[Curation]졸업 대신 떠난, 유럽 문학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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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살의 여름,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이대로 졸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졸업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대학이라는 안전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사회인으로서 나를 부양하고 책임질 마음의 준비가. 그래서 도피하듯 갭이어를 택해 독일로 떠났다.


갭이어를 떠나기 전의 나는 좋아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늘 고민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소설가를 꿈꿨지만,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단 한 번도 글의 편을 든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고전 문학 독서모임을 운영하고, 시간을 쪼개 허구의 이야기를 쓰며 보냈다. 일이나 시험공부 같은 현실의 문제에 자주 밀려나기는 했지만, 문학만큼은 끝내 놓지 못했다.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그 순서를 바꿔볼 수 있었다. 전공이나 취업 같은 현실적인 일이 아니라, 오래 동경했던 공부를 기준으로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다. 영문학을 공부하고, 좋아하는 작가들을 따라 여행을 떠났다. 괴테가 살던 집을 찾아가고, 카프카를 읽으며 프라하를 걷고, 『이탈리아 기행』을 들고 로마를 여행했다.


돌아보면, 독일에서 보낸 갭이어는 오래 동경했지만 늘 현실에 밀려 뒤로 미뤄두었던 문학을 삶의 가장 앞단에 두고 살아본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시기를 '문학기행'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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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 프랑크푸르트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ㅣ 📚 파우스트 (괴테)

📍괴테 하우스 ㅣ📍마인강


모든 시작은 우연이었다.


독일에 도착한 뒤, 독일 문학의 상징 같은 존재인 괴테의 생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괴테 하우스를 찾았다. 그때는 이곳이 반 년 동안 이어질 문학기행의 출발점이 될 줄은 몰랐다.


괴테 하우스는 괴테가 젊은 시절 살았던 집과 그 옆 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잘 보존된 괴테의 집도 흥미로웠지만 더 마음이 갔던 곳은 박물관이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가들을 조명하는 전시부터 직접 문장을 타이핑해 보는 타자기, 태엽을 감으면 이야기가 움직이는 설치 작품, 시를 들을 수 있는 청음 공간까지. 문학을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출구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다 괴테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공간을 마주한 순간, 이 박물관과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 거대한 창과 의자만 놓인 조용한 공간은 괴테의 책을 읽기 위해 마련된 것처럼 보였다. 아쉽게도 독일어를 읽을 수 없었던 나는 책 대신 잠시 머물며 일기를 썼다.


문득 괴테가 이 집에서 썼다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궁금해졌다. 다음 일정이었던 슈테델 미술관은 미루고, 마인강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실내에만 있기엔 날이 너무 좋았다. 잔디밭에 누워 베르테르를 읽고, 노을과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렇게 시작한 괴테는 『파우스트』로 이어졌고, 결국 『이탈리아 기행』을 들고 로마까지 가게 된다. 


돌아보면 모든 시작은 괴테 하우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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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 프라하


📚 카프카의 프라하 (최유안) ㅣ 📚 디 에센셜 프란츠 카프카 (민음사)

📍카프카 박물관  ㅣ 📍프란츠 카프카 두상  ㅣ 📍카페 사보이


모든 건 작년 여름, 카프카 기일 카페를 다녀온 날로부터 시작됐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생일 카페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 행사는 카프카 타계 100주기를 맞아 문학동네에서 기획한 이벤트였다. 평소 카프카를 좋아했던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다가 Traktat의 카프카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봤다.


'이 티셔츠를 입고 프라하에 가야겠다.'


프라하 여행은 그 생각 하나에서 출발했다. 움직이는 카프카 동상을 보고, 『디 에센셜 프란츠 카프카』를 읽고, 박물관에 가고, 카프카가 일했던 보험 공단을 찾아가고, 그가 자주 갔던 카페에 들렀다. 강변에 누워 카프카를 읽고, 카페에 앉아 감상을 쓰고, 박물관을 나온 뒤 다시 그의 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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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달리 프라하에는 카프카의 흔적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박물관에도 그의 편지와 일기, 원고가 전시되어 있을 뿐이었고, 살던 집은 잦은 이사로 남아 있지 않았다. 카프카가 일했던 보험 공단 자리에는 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어느 정도 알고 간 사실이었지만 조금은 아쉬웠다.


그럼에도 이 여행이 즐거웠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카프카 티셔츠 덕분에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고, 오래 미뤄두었던 카프카의 장편 소설을 끝냈다. 카프카를 생각하며 프라하 골목을 걷는 동안 도시의 일상이 책과 겹쳐 보였고, 카페를 찾아가던 길에는 우연히 오래 머물고 싶은 서점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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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 로마, 피렌체


📚 이탈리아 기행 (괴테)

📍바티칸 박물관  ㅣ 📍두오모 성당  ㅣ 📍시네마 오데온


갭이어의 마지막 한 달은 한국에서 온 친구와 여행을 다녔다. 그 친구로부터 가져다줄 것이 없냐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주저 없이 『이탈리아 기행』을 부탁했다. 여행 내내 들고 다니기에는 꽤 무거운 종이책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만큼은 전자책으로 읽고 싶지 않았다.


독일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파우스트』를 완독한 뒤였으니 마지막은 괴테가 가장 사랑했던 도시, 로마에서 『이탈리아 기행』을 읽고 싶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이 책을 또 언제 펼칠 수 있을까 싶었다.


『이탈리아 기행』은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이다. 바이마르 공국에서 고문관으로 일하던 그는 굳어버린 창작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다. 춥고 비 오던 독일에서 해가 쨍쨍한 이탈리아로 향하던 나 역시 그 대목에 자주 멈춰 섰다.


몇 백 년 전 괴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탈리아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친구들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며 의견을 구하고, 새로운 풍경 앞에서 설레는 모습. 내가 편지를 좋아하는 이유와도 닮아 있었다.


나의 이탈리아 여행은 이 책 덕분에 더 생생하게 남아있다. 제법 두꺼운 책이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한다면 조심스럽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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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 마라케시


📚 듄 (프랭크 허버트)  ㅣ  📚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

📍사하라 사막  ㅣ 📍마조렐 정원


유럽에 있는 동안 꼭 한 번은 아프리카에 가보고 싶었다. 모로코는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였고, 무엇보다 내가 오래 좋아했던 이야기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사하라 사막은 『듄』의 영감이 된 곳이고, 마라케시는 이브 생 로랑이 사랑했던 도시다.


직항 비행기가 없어 경유지인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15시간을 노숙하고, 다시 긴 이동 끝에 사하라 사막에 도착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모험을 해볼까 싶었다.


사하라에서는 계속 『듄』을 떠올렸다. 모래밖에 없는 풍경, 피부를 태우는 열기, 끝없이 이어지는 사구를 걷다 보니 프레멘들이 왜 그렇게 걸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영화의 배경을 본 것이 아니라, 소설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풍경을 직접 경험한 기분이었다. 구름이 많아 별도, 노을도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내 목적은 사막의 아름다움보다 『듄』의 사막을 경험하는 것이었으니까.


마조렐 정원에는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를 다시 읽고 갔다.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가 생전에 가꾸고, 이후에 그들이 묻힌 마조렐 정원은 아름다웠지만, 그들의 흔적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에 남은 건 포토존에서 책을 꺼냈다가 문학과 카프카를 좋아하는 법학도 가드와 나눈 대화였다. 낯선 아프리카의 정원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문학을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여행을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정원을 나오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를 적어도 10년은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Writer. 영원 (@everxnest) 

에디터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 대학 시절 예술 분야 공공기관과 IT 스타트업을 경험하며 삶과 일의 방식을 고민하게 되었다. 2025년에는 그 질문을 안고 독일에서 갭이어를 보냈고, 자율성과 책임이 공존하는 환경에서 오래 창작하는 삶을 지향하게 되었다. 현재는 사이드 콜렉티브에서 브랜드와 사람의 이야기를 만드는 에디터이자, 일상과 취향을 글과 영상으로 풀어내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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