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IDE Playlist [Inspire - 해서]
(버튼을 누르면 플레이리스트로 연결됩니다)

대도시에 조성된 잘 가꾸어진 초록. 나는 그것으로 만족이 안 된다. 집에서 관리하는 작은 화분들로도 성에 안 찬다. 초록을 생생하게 가꾸는 데 있어 자연만큼 탁월한 전문가는 없다. 봄꽃도 좋지만 꽃이 진 자리에 돋아난 새순을 볼 때면 황홀한 지경이니, 사월 중순 나는 경주로 향했다. 대릉원과 토함산, 계림 등 경주는 눈만 돌리면 빛나는 봄의 초록이 널리고 널린 곳이었다. 현지에서 오래 살고 있는 주민에게도 사월과 오월 사이 경주의 색은 질리지 않는 것인지 입을 모아 찬양한다.
이 나무가 저 나무 같고, 아까 본 나무가 또 보여도 나무를 많이 찍었다. 높은 건물이 거의 없어서, 시내에서 조금만 차를 타고 나가면 사방이 언덕이고 능이고 산과 바다다. 벚꽃만 지고 없을 뿐 기대에 없던 꽃구경도 많이 했다. 조팝나무 꽃, 모과나무 꽃, 박태기나무 꽃 등 하얗고 분홍빛인 별이 초록 우주 사이사이에 존재했다.

이럴 때가 아니긴 했다. 할 일이 많다. 응모해야 할 공모전 마감이 코앞이고, 만나야 할 사람들도 있었다. 밀린 원고도 있다. 그 와중에 유유자적 봄나들이를 길게 떠나는 게 맞는지, 기차에 올라타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애초에 내 확신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초록이 알아서 믿게 해줬으니까.
나는 이 여행 덕분에 잠시나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을 누릴 수 있었다. 생산하고 증명하는 내가 아닌, 감탄하고 감응하는 나를 만났다. 이 만남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자각과 잠시라도 봤으니 족하다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쓸쓸하고도 좋은 마음으로 경주를 거닐었다. 서울로 돌아와 경주를 생각하며 꾸린 플레이리스트는 내 마음을 닮은 것 같다. 더 깊은 초록을 향해 닿고 싶고 내 안의 초록을 헤집고 들고 싶은, 슬프고 아름다운 충동으로 가득한 목소리들.

Writer. 김해서 (@unanswered.letters)
에디터. 인터뷰 및 제품 소개와 같은 글쓰기로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랜스 에디터. 사이드 콜렉티브의 요원으로서도 텍스트 기반 상상력이 필요한 몇몇 일들에 참여해 왔다. 유년과 꿈, 사랑 등을 키워드로 세미콜론 출판사에서 산문집을 내기도 했으며, 이와 같이 ‘에디터’ 그리고 ‘작가’라는 두 가지 메인 직함을 유지하고 있으나 가장 오래된 꿈은 ‘시인’. 문단의 심사를 통과하는, 공식적인 데뷔 루트를 밟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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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에 조성된 잘 가꾸어진 초록. 나는 그것으로 만족이 안 된다. 집에서 관리하는 작은 화분들로도 성에 안 찬다. 초록을 생생하게 가꾸는 데 있어 자연만큼 탁월한 전문가는 없다. 봄꽃도 좋지만 꽃이 진 자리에 돋아난 새순을 볼 때면 황홀한 지경이니, 사월 중순 나는 경주로 향했다. 대릉원과 토함산, 계림 등 경주는 눈만 돌리면 빛나는 봄의 초록이 널리고 널린 곳이었다. 현지에서 오래 살고 있는 주민에게도 사월과 오월 사이 경주의 색은 질리지 않는 것인지 입을 모아 찬양한다.
이 나무가 저 나무 같고, 아까 본 나무가 또 보여도 나무를 많이 찍었다. 높은 건물이 거의 없어서, 시내에서 조금만 차를 타고 나가면 사방이 언덕이고 능이고 산과 바다다. 벚꽃만 지고 없을 뿐 기대에 없던 꽃구경도 많이 했다. 조팝나무 꽃, 모과나무 꽃, 박태기나무 꽃 등 하얗고 분홍빛인 별이 초록 우주 사이사이에 존재했다.
이럴 때가 아니긴 했다. 할 일이 많다. 응모해야 할 공모전 마감이 코앞이고, 만나야 할 사람들도 있었다. 밀린 원고도 있다. 그 와중에 유유자적 봄나들이를 길게 떠나는 게 맞는지, 기차에 올라타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애초에 내 확신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초록이 알아서 믿게 해줬으니까.
나는 이 여행 덕분에 잠시나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을 누릴 수 있었다. 생산하고 증명하는 내가 아닌, 감탄하고 감응하는 나를 만났다. 이 만남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자각과 잠시라도 봤으니 족하다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쓸쓸하고도 좋은 마음으로 경주를 거닐었다. 서울로 돌아와 경주를 생각하며 꾸린 플레이리스트는 내 마음을 닮은 것 같다. 더 깊은 초록을 향해 닿고 싶고 내 안의 초록을 헤집고 들고 싶은, 슬프고 아름다운 충동으로 가득한 목소리들.
Writer. 김해서 (@unanswered.letters)
에디터. 인터뷰 및 제품 소개와 같은 글쓰기로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랜스 에디터. 사이드 콜렉티브의 요원으로서도 텍스트 기반 상상력이 필요한 몇몇 일들에 참여해 왔다. 유년과 꿈, 사랑 등을 키워드로 세미콜론 출판사에서 산문집을 내기도 했으며, 이와 같이 ‘에디터’ 그리고 ‘작가’라는 두 가지 메인 직함을 유지하고 있으나 가장 오래된 꿈은 ‘시인’. 문단의 심사를 통과하는, 공식적인 데뷔 루트를 밟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