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도는 반드시 어느 곳에 두 발을 디뎌야만 시작된다. 첫걸음을 떼는 게 중요하니 어디에서 시작해도 상관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처럼 우리는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장소의 모습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나다움을 지속하기 위해 사소한 방식으로라도 중요한 가치를 시작의 공간에 심어야 한다. 골똘히 생각해도 어떤 게 나다운 시작인지 모르겠다면, 가까이에 있는 공간과 그곳에서 시작한 사람의 모습을 한번 겹쳐보자.
1. 폴듬

마을버스도 힘겹게 올라가는 해방촌의 가파른 언덕. 그 정상에 오르기 전, 달콤한 향기로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디저트 스튜디오가 있다. 바로 비주얼 베이커 장다연이 운영하고 있는 폴듬(POLDMH)이다.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는 작업실 겸 모두를 맞이하는 카페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그녀를 설명해 준 건 누데이크(NUDAKE)였다. 먹물로 만든 크루아상을 뜯어 말차 크림에 찍어먹는 케이크, 블랙핑크 제니의 첫 앨범 발매를 축하하는 빨간 구두 케이크 등. 현대미술을 방불케 하는 그녀의 베이커리 메뉴 덕분에 누데이크가 빠른 시간 안에 대중에게 알려졌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해방촌 공간을 둘러보면 누데이크의 화려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스타일이 달라진 걸까? 그건 아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제작해 온 결과물을 나열하면, 그녀는 집중해야 할 것을 명확히 알고 있고 그런 성향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도 여전히 묻어난다.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야 하는 주방은 실험실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능적이고, 케이크는 주인장의 작고 귀여운 위트를 뒷받침하는 캔버스가 되고, 테이블·수저받침·포크·의자는 우리의 시선이 케이크로 향하도록 같은 재질로 맞췄다. 심지어 화장실에는 향이 강하지 않은 이솝 핸드워시를 두어, 디저트에 의도된 감각이 훼손되는 걸 방지했다. 본인이 몸담았던 회사의 자매 브랜드 탬버린즈를 놓을 법도 한데 말이다.


몇 년 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같은 분야의 레퍼런스를 찾아보는 행동이 본인도 모르게 창작물에 대한 한계를 만든다”. 지금의 폴듬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붓으로 휘갈긴 영어 문장, 제철 과일을 지나칠 정도로 쌓은 케이크, 공감하기 어려운 감성의 빈티지 포스터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 서울 용산구 신흥로 107-1 1층
· Instagram @poldmh
2. 로파서울

어떤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할 때, 우린 그걸 실제로 갖고 있지 않을 확률이 크다. 그 단어의 실체를 금방 확인할 겨를이 없기에 순간은 모면할 수 있겠지만, 표현을 남발한 대가는 예고 없이 그리고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업보처럼.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취향’과 ‘감도’를 듣고 있으면, “시간이 얼마나 많이 소요되는 일인데 저렇게 쉽게 말해도 되나?” 싶은 걱정이 든다. 그래서 취향과 감도에 관해 말할 때 조심스러워지고, 특히 취향의 집합으로 할 수 있는 편집샵을 추천할 땐 더욱 말을 아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괜찮은 편집샵을 소개해야 할 땐, 용산역 부근의 로파서울을 추천하고 있다.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 SWNA 출신의 디자이너 김영지가 차린 곳인데, 편집샵 특유의 느끼함이 없어 좋아한다. 여기서 느끼함은 브랜드의 역사와 권위에 기대어, 이미 정해진 답을 소비자에게 보여주며 취향을 강요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로파서울은 브랜드보다는 제품의 고유함과 가격의 합리성을 설명하는 데 충실하며, 소비자가 스스로 취향의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아마 이건 좋은 디자인을 합리적인 금액으로 선보이는 산업 디자이너 경력이 바탕이 되었을 것 같다.


취향의 마지막 방점을 소비자에게 넘겨주는 모습은 새로 확장된 매장에서도 보인다. 보통 편집샵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모습을 직관적으로 스타일링하지만, 로파서울은 제품 주변을 과하게 연출하지 않아 소비자로 하여금 내 공간에 두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물론 근사한 장면으로 편집샵을 떠올리기엔 어려울 테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을 알려주는 근사한 편집샵으로 기억되려면 이 방법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11길 21 3-4층
· Instagram @lofa_seoul
3. 자키러브

요즘 1인 사장이 운영하는 공간이 부쩍 늘어났다. 최근 현상이라 구체적인 통계나 수치로 설명할 순 없지만, 앞선 세대와 달리 지금의 1인 사장이 본인의 취향 자아를 경제성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건 분명해 보인다. 페르소나를 먼저 떠올리지 않고 지향하는 삶이나 자기 이름을 반영하는 공간이 많아진 게 그 징표인데, 후암동 LP 카페 ‘자키러브’는 운영자의 추구미와 이름을 동시에 품고 있다.


바리스타 겸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이정철은 영어 이름 ‘JACK’과 중요한 삶의 가치 ‘LOVE’를 합친 자키러브를 운영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와 커피를 공유하고 있다. 혹시 인스타그램에서 가끔씩 음악을 디깅하는 편이라면, 해사한 미소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노래를 소개하는 그의 모습을 마주할 수도 있다. 이렇게 건실히 사는 청년은 동네에서 제일 일찍 열고, 제일 늦게 닫는 카페가 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해왔다. 이미 충분히 갓생인 것 같은데, 얼마나 더 열심히 살고 싶은 걸까?
LP 카페를 그가 좋아하는 재즈 공연장으로, 그리고 그를 무대의 가장 오랜 연주자로 생각해 보면 납득할 만하다.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기니 오래 있고 싶을 수밖에. 그가 틈틈이 리듬을 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데, 이런 여유는 다양한 메뉴를 만들지 않는 선택에서 비롯된다. 화려한 디저트를 내어주는 것보다 음악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이곳에 더 어울리는 페어링이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데는 좌석 디테일도 큰 역할을 한다. 압도적인 풍경이나 거대한 오디오 시스템을 향하도록 설계된 LP 카페에서는 경직된 상태로 음악을 듣게 되지만, 자키러브처럼 좌석 유형과 가구를 다르게 구성하면 앉는 자리에 따라 음악을 듣는 방식이 바뀌게 된다.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보다, 누구와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 주인장의 마음이 이런 차이를 만든다.
· 서울 용산구 후암로40길 3, 1층
· Instagram @zakilovecom
4. 아사시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처럼 다른 사람의 어려움은 내가 아니기에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스스로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풀어나가기가 힘들다. 조직과 소속, 장르를 넘나들며 근사한 결과물을 만들다가 온전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앞에선 쭈뼛거리는 마케터, 에디터, 디자이너, 디렉터라면 바로 공감할 것이다. 많이 알고 깊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독이 되어, 사이드 프로젝트가 진전되지 않거나 엉성한 작업물이 만들어지는 상황. 본인의 일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은 겪어봤으리라 생각한다.
군더더기 없는 브랜딩으로 주목받았던 서비스센터 출신의 디렉터 배재희도 자신의 첫 티하우스를 준비할 때 그랬을까? 깔끔한 타이포그래피와 직관적인 디자인으로 부산 로컬 카페 ‘베르크 로스터스’를 탈바꿈시켰던 그녀는 독립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작업물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의 의도가 담긴 디자인을 탐미하는 글을 인스타그램, 스레드 계정에 꾸준히 써 내려갔다. 장르도, 규모도, 국가도, 시대도 가리지 않고 기록한 글은 분명 외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지난한 과정은 본인의 고유함을 찾아가는 수련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티하우스 ‘아사시(asasi)’를 개업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난생처음 듣는 단어 아사시는 동남아시아, 페르시아 문화권 국가에서 ‘본질적’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을지로의 오래된 건물 계단을 헤집어 찻집에 다다르면 낯선 풍경을 마주하게 되는데, 테이블을 뚫고 나온 기둥이 천장을 받치지 않고 우두커니 서있다. 디저트와 음료도 그녀가 기록한 글처럼 편견 없이 재료를 혼합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맛을 예상할 수가 없다.

아마 그녀는 익숙하지 않은 장면과 메뉴를 선보이면서 사람들이 고정관념을 지운 채 맛을 느끼도록 유도한 듯하다. 추측하자면 그녀에게 맛의 본질은 ‘음미’하는 것이다. 인증샷을 찍으려는 누군가의 순간으로부터 메뉴를 즐기는 사람을 가려주는 기둥, 디저트와 음료를 강조하지 않는 간접조명, 항상 손님 앞으로 지나가며 인기척 없이 나타나지 않는 배려. 그렇게 노골적이지 않은 의도들이 음미의 경험을 뒷받침하고 있다.
· 서울 중구 을지로 130-1 4층, 401호
· Instagram @asasi.seoul
5. 온그라운드

뭐든 바쁘게 움직이는 서울에서 서촌의 시간은 유유히 흐른다. 오래된 건물이 경제적 논리에 의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공간은 주변과의 조화를 고려하며 탄생하기 때문일까? 이런 우직한 동네 분위기에 기대어 여유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이 서촌을 찾아오는 듯하다.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서촌의 공간은 다를 테지만, 선택지를 다섯 손가락까지 넓혀주면 ‘온그라운드’는 거뜬히 그 안에 들어갈 것이다.


‘서촌의 사랑방’ 온그라운드는 건축가 조병수가 운영하는 첫 번째 상업공간으로, 그의 건축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참고로 그는 국내 LP카페의 원조격인 음악감상실 ‘카메라타’, 남해바다와 눈을 맞춘 스테이 ‘지평집’ 등을 설계하며 이름을 알렸다. 대중적으로 건축가는 예술성을 토대로 창작하는 전문가처럼 비치지만, 사실 웬만하면 누군가의 의뢰와 자본으로 건물을 설계하기 때문에 예술적 자아를 마음껏 펼치지 못한다. 그래서 건축가의 마음 한 구석엔 자신이 의도한 대로 공간을 운영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조병수는 서촌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같은 건물 1층의 빈 공간을 개조하는 걸로 그 마음을 해소했다. 그게 바로 온그라운드. 다양한 활동이 일어나는 한옥의 마당처럼, 그는 특정한 용도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을 한국건축의 특징이라 여기고 그걸 자신의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지어진 지 100년도 넘은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문화재처럼 받들지 않고, 옆 건물과 뒷 건물을 연결하는 마당처럼 만들었다. 지금 온그라운드에 머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해 보이는 건,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 포용성이 공간에 깃들어서이지 않을까?


·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0길 23
· Instagram @onground_cafe
Writer. 김예람 (@ram.ye)
에디터 겸 큐레이션 미디어 BLIMP 운영자. 도시와 공간에 남겨진 사람들의 흔적을 자신만의 도토리 창고에 모으고,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흔적의 의미를 되짚는 콘텐츠로 만들고 있다. 매끄럽게 재생되는 이야기보다는, 생각할 만한 구석이 갑자기 튀어나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게 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요즘은 사람들을 자주 놀라게 하고 싶어 영상으로 말하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는 반드시 어느 곳에 두 발을 디뎌야만 시작된다. 첫걸음을 떼는 게 중요하니 어디에서 시작해도 상관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처럼 우리는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장소의 모습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나다움을 지속하기 위해 사소한 방식으로라도 중요한 가치를 시작의 공간에 심어야 한다. 골똘히 생각해도 어떤 게 나다운 시작인지 모르겠다면, 가까이에 있는 공간과 그곳에서 시작한 사람의 모습을 한번 겹쳐보자.
1. 폴듬
마을버스도 힘겹게 올라가는 해방촌의 가파른 언덕. 그 정상에 오르기 전, 달콤한 향기로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디저트 스튜디오가 있다. 바로 비주얼 베이커 장다연이 운영하고 있는 폴듬(POLDMH)이다.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는 작업실 겸 모두를 맞이하는 카페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그녀를 설명해 준 건 누데이크(NUDAKE)였다. 먹물로 만든 크루아상을 뜯어 말차 크림에 찍어먹는 케이크, 블랙핑크 제니의 첫 앨범 발매를 축하하는 빨간 구두 케이크 등. 현대미술을 방불케 하는 그녀의 베이커리 메뉴 덕분에 누데이크가 빠른 시간 안에 대중에게 알려졌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해방촌 공간을 둘러보면 누데이크의 화려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스타일이 달라진 걸까? 그건 아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제작해 온 결과물을 나열하면, 그녀는 집중해야 할 것을 명확히 알고 있고 그런 성향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도 여전히 묻어난다.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야 하는 주방은 실험실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능적이고, 케이크는 주인장의 작고 귀여운 위트를 뒷받침하는 캔버스가 되고, 테이블·수저받침·포크·의자는 우리의 시선이 케이크로 향하도록 같은 재질로 맞췄다. 심지어 화장실에는 향이 강하지 않은 이솝 핸드워시를 두어, 디저트에 의도된 감각이 훼손되는 걸 방지했다. 본인이 몸담았던 회사의 자매 브랜드 탬버린즈를 놓을 법도 한데 말이다.
몇 년 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같은 분야의 레퍼런스를 찾아보는 행동이 본인도 모르게 창작물에 대한 한계를 만든다”. 지금의 폴듬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붓으로 휘갈긴 영어 문장, 제철 과일을 지나칠 정도로 쌓은 케이크, 공감하기 어려운 감성의 빈티지 포스터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 서울 용산구 신흥로 107-1 1층
· Instagram @poldmh
2. 로파서울
어떤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할 때, 우린 그걸 실제로 갖고 있지 않을 확률이 크다. 그 단어의 실체를 금방 확인할 겨를이 없기에 순간은 모면할 수 있겠지만, 표현을 남발한 대가는 예고 없이 그리고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업보처럼.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취향’과 ‘감도’를 듣고 있으면, “시간이 얼마나 많이 소요되는 일인데 저렇게 쉽게 말해도 되나?” 싶은 걱정이 든다. 그래서 취향과 감도에 관해 말할 때 조심스러워지고, 특히 취향의 집합으로 할 수 있는 편집샵을 추천할 땐 더욱 말을 아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괜찮은 편집샵을 소개해야 할 땐, 용산역 부근의 로파서울을 추천하고 있다.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 SWNA 출신의 디자이너 김영지가 차린 곳인데, 편집샵 특유의 느끼함이 없어 좋아한다. 여기서 느끼함은 브랜드의 역사와 권위에 기대어, 이미 정해진 답을 소비자에게 보여주며 취향을 강요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로파서울은 브랜드보다는 제품의 고유함과 가격의 합리성을 설명하는 데 충실하며, 소비자가 스스로 취향의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아마 이건 좋은 디자인을 합리적인 금액으로 선보이는 산업 디자이너 경력이 바탕이 되었을 것 같다.
취향의 마지막 방점을 소비자에게 넘겨주는 모습은 새로 확장된 매장에서도 보인다. 보통 편집샵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모습을 직관적으로 스타일링하지만, 로파서울은 제품 주변을 과하게 연출하지 않아 소비자로 하여금 내 공간에 두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물론 근사한 장면으로 편집샵을 떠올리기엔 어려울 테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을 알려주는 근사한 편집샵으로 기억되려면 이 방법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11길 21 3-4층
· Instagram @lofa_seoul
3. 자키러브
요즘 1인 사장이 운영하는 공간이 부쩍 늘어났다. 최근 현상이라 구체적인 통계나 수치로 설명할 순 없지만, 앞선 세대와 달리 지금의 1인 사장이 본인의 취향 자아를 경제성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건 분명해 보인다. 페르소나를 먼저 떠올리지 않고 지향하는 삶이나 자기 이름을 반영하는 공간이 많아진 게 그 징표인데, 후암동 LP 카페 ‘자키러브’는 운영자의 추구미와 이름을 동시에 품고 있다.
바리스타 겸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이정철은 영어 이름 ‘JACK’과 중요한 삶의 가치 ‘LOVE’를 합친 자키러브를 운영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와 커피를 공유하고 있다. 혹시 인스타그램에서 가끔씩 음악을 디깅하는 편이라면, 해사한 미소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노래를 소개하는 그의 모습을 마주할 수도 있다. 이렇게 건실히 사는 청년은 동네에서 제일 일찍 열고, 제일 늦게 닫는 카페가 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해왔다. 이미 충분히 갓생인 것 같은데, 얼마나 더 열심히 살고 싶은 걸까?
LP 카페를 그가 좋아하는 재즈 공연장으로, 그리고 그를 무대의 가장 오랜 연주자로 생각해 보면 납득할 만하다.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기니 오래 있고 싶을 수밖에. 그가 틈틈이 리듬을 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데, 이런 여유는 다양한 메뉴를 만들지 않는 선택에서 비롯된다. 화려한 디저트를 내어주는 것보다 음악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이곳에 더 어울리는 페어링이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데는 좌석 디테일도 큰 역할을 한다. 압도적인 풍경이나 거대한 오디오 시스템을 향하도록 설계된 LP 카페에서는 경직된 상태로 음악을 듣게 되지만, 자키러브처럼 좌석 유형과 가구를 다르게 구성하면 앉는 자리에 따라 음악을 듣는 방식이 바뀌게 된다.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보다, 누구와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 주인장의 마음이 이런 차이를 만든다.
· 서울 용산구 후암로40길 3, 1층
· Instagram @zakilovecom
4. 아사시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처럼 다른 사람의 어려움은 내가 아니기에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스스로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풀어나가기가 힘들다. 조직과 소속, 장르를 넘나들며 근사한 결과물을 만들다가 온전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앞에선 쭈뼛거리는 마케터, 에디터, 디자이너, 디렉터라면 바로 공감할 것이다. 많이 알고 깊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독이 되어, 사이드 프로젝트가 진전되지 않거나 엉성한 작업물이 만들어지는 상황. 본인의 일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은 겪어봤으리라 생각한다.
군더더기 없는 브랜딩으로 주목받았던 서비스센터 출신의 디렉터 배재희도 자신의 첫 티하우스를 준비할 때 그랬을까? 깔끔한 타이포그래피와 직관적인 디자인으로 부산 로컬 카페 ‘베르크 로스터스’를 탈바꿈시켰던 그녀는 독립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작업물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의 의도가 담긴 디자인을 탐미하는 글을 인스타그램, 스레드 계정에 꾸준히 써 내려갔다. 장르도, 규모도, 국가도, 시대도 가리지 않고 기록한 글은 분명 외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지난한 과정은 본인의 고유함을 찾아가는 수련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티하우스 ‘아사시(asasi)’를 개업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난생처음 듣는 단어 아사시는 동남아시아, 페르시아 문화권 국가에서 ‘본질적’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을지로의 오래된 건물 계단을 헤집어 찻집에 다다르면 낯선 풍경을 마주하게 되는데, 테이블을 뚫고 나온 기둥이 천장을 받치지 않고 우두커니 서있다. 디저트와 음료도 그녀가 기록한 글처럼 편견 없이 재료를 혼합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맛을 예상할 수가 없다.
아마 그녀는 익숙하지 않은 장면과 메뉴를 선보이면서 사람들이 고정관념을 지운 채 맛을 느끼도록 유도한 듯하다. 추측하자면 그녀에게 맛의 본질은 ‘음미’하는 것이다. 인증샷을 찍으려는 누군가의 순간으로부터 메뉴를 즐기는 사람을 가려주는 기둥, 디저트와 음료를 강조하지 않는 간접조명, 항상 손님 앞으로 지나가며 인기척 없이 나타나지 않는 배려. 그렇게 노골적이지 않은 의도들이 음미의 경험을 뒷받침하고 있다.
· 서울 중구 을지로 130-1 4층, 401호
· Instagram @asasi.seoul
5. 온그라운드
뭐든 바쁘게 움직이는 서울에서 서촌의 시간은 유유히 흐른다. 오래된 건물이 경제적 논리에 의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공간은 주변과의 조화를 고려하며 탄생하기 때문일까? 이런 우직한 동네 분위기에 기대어 여유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이 서촌을 찾아오는 듯하다.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서촌의 공간은 다를 테지만, 선택지를 다섯 손가락까지 넓혀주면 ‘온그라운드’는 거뜬히 그 안에 들어갈 것이다.

‘서촌의 사랑방’ 온그라운드는 건축가 조병수가 운영하는 첫 번째 상업공간으로, 그의 건축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참고로 그는 국내 LP카페의 원조격인 음악감상실 ‘카메라타’, 남해바다와 눈을 맞춘 스테이 ‘지평집’ 등을 설계하며 이름을 알렸다. 대중적으로 건축가는 예술성을 토대로 창작하는 전문가처럼 비치지만, 사실 웬만하면 누군가의 의뢰와 자본으로 건물을 설계하기 때문에 예술적 자아를 마음껏 펼치지 못한다. 그래서 건축가의 마음 한 구석엔 자신이 의도한 대로 공간을 운영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조병수는 서촌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같은 건물 1층의 빈 공간을 개조하는 걸로 그 마음을 해소했다. 그게 바로 온그라운드. 다양한 활동이 일어나는 한옥의 마당처럼, 그는 특정한 용도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을 한국건축의 특징이라 여기고 그걸 자신의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지어진 지 100년도 넘은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문화재처럼 받들지 않고, 옆 건물과 뒷 건물을 연결하는 마당처럼 만들었다. 지금 온그라운드에 머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해 보이는 건,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 포용성이 공간에 깃들어서이지 않을까?
·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0길 23
· Instagram @onground_cafe
Writer. 김예람 (@ram.ye)
에디터 겸 큐레이션 미디어 BLIMP 운영자. 도시와 공간에 남겨진 사람들의 흔적을 자신만의 도토리 창고에 모으고,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흔적의 의미를 되짚는 콘텐츠로 만들고 있다. 매끄럽게 재생되는 이야기보다는, 생각할 만한 구석이 갑자기 튀어나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게 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요즘은 사람들을 자주 놀라게 하고 싶어 영상으로 말하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