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이자 기획자인 혜민은 퇴사 후 결혼식 행진 대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왔다. 콘텐츠 스튜디오 900KM를 창업해 지금까지 총 4권의 책을 냈고,‘요즘 것들의 사생활(요즘사)’ 유튜브에 다양한 인터뷰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요즘사에는 한 발짝 정도 앞서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요즘 것들’의 레퍼런스가 모여있다. 영광스럽게도 작년 말에 나도 ‘밀레니얼 뉴 노멀 라이프' 시리즈로 요즘사와 인터뷰를 했는데, 나는 역으로 이런 콘텐츠를 주도적으로 만들고 있는 혜민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나를 인터뷰한 사람을 인터뷰한 것이 처음이었다. 벚꽃이 피며 봄의 ‘시작’을 알리던 4월의 첫 날. 혜민이 여러 가지를 시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물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그 자체로 누구든지 서로가 서로의 레퍼런스가 될 수 있다는 증거 같아 더욱 기쁜 마음으로 소개한다.
백구부부의 산티아고 순례길
융: 백구 부부가 결혼식 대신 산티아고로 떠났던 이유를 사이더들이 가장 궁금해할 것 같아요. 어떻게 가게 된 거예요?
*남편 현우의 애칭이 ‘백구’이고 혜민이 '구백킬로미터'를 운영하면서 백구와 구백을 합쳐 ‘백구 부부’로 불린다.
혜민: 둘 다 취준생일 때 어렵게 준비해서 좋아하는 일로 회사에 들어갔지만, ‘프로 야근러’로 일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여름 휴가를 같이 가기로 했다가, 일 때문에 가을로 미뤘는데 또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비행기표를 취소하게 된 거예요. 그때 펑펑 울었어요. 그 시기 즈음에 결혼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요, ‘결혼’ 이야기가 나오니까 갑자기 아빠도 아는 분이 예식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예단, 예물과 같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나오고, 돈도 많이 들고... ‘이게 다 뭐지?’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현우가 던진 “산티아고 순례길 같이 걸을까?”라는 한마디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어요. 드넓은 들판에 둘이 손잡고 걸어가는 게 상상되면서 결혼 대신에 할만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혼이 가진 상징성과도 잘 들어맞는 것 같았고요. 그 길의 거리가 900km 정도 된다고 해서 여행의 제목도 “이건 900km 웨딩마치다"라고 정했어요.
융: 역시 기획자인데요.
혜민: 결혼은 둘이 주인공이고 같이 걸어가는 상상을 했는데, 일반적인 결혼은 제가 생각한 것과는 거리가 멀더라고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같이 걷는 건 우리 둘이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고, 완전히 판을 깰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바로 갈 수가 없어서 얘기가 나오고 2년 후에 둘다 각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가게 됐어요.
융: 가족들이 반대하진 않았어요?
혜민: 우려가 많았죠. 작전을 짜서 각자 부모님들에게 조금씩 이야기했어요. 독특하게 결혼하는 분들 링크 보내면서 요즘에는 이런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요.
융: 퇴사하고 가는 것도 그렇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얼마나 다녀왔어요?
혜민: 3개월을 다녀왔어요. 42일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나머지는 스페인 주변을 여행했어요. 걸어가는 게 결혼식이고, 끝난 이후엔 신혼여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우리의 하객이고요. 나비넥타이와 면사포를 챙겨 들고, 곳곳마다 사진을 찍었어요. 즐거울 줄 알았는데, 우리가 걸었던 날의 절반 이상이 비가 왔어요. 매일 진흙밭을 걸어야 했죠.
저는 진짜 체력이 약하거든요. 한국에서 여름휴가도 제주 올레길로 떠나서 전지훈련도 하고, 잘 준비하고 갔는데요. 산티아고 순례길은 제가 생각한 ‘평지’가 아니더라고요. 매일 관악산 하나쯤은 건너야 해요.
중간까지는 너무 힘들어서 매일 울었어요. 나중에는 걷는 요령도 파악하고, 이 생활에도 익숙해졌지만요. 첫날이 제일 힘들었어요. 가파르고 악명 높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야 하는데, 3월 중순에 눈이 쌓여 있어서 우회길로 갔어요. 거기서 10시간을 헤맸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신나서 한발 걷고 사진 찍고 하다가 나중에 보니까 주변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먹을 것도 다 떨어지고… 우리의 목적지였던 수도원 표지판 보자마자 엄청 울었어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죠.
융: 0km에서 숫자가 점점 올라갈 때는 어땠어요? 혜민이 지금 만들어나가는 ‘길’과도 겹쳐 보여요.
혜민: 몸소 겪은 일이라 몸에 체득된 게 있어요. 아무리 같이 걸어주는 사람이 있고, 누가 내 짐을 덜어주고 도와줘도 결국엔 내 걸음은 내가 걸어야 해요. 내가 걷지 않으면 목적지에 갈 수가 없어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루에 20~30km씩 매일 걸어야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막막했어요. 0km가 어떻게 900km가 되지? 우리가 겨우 20km를 걸었다고?
산티아고를 다녀와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냐는 질문을 받아요. 걸으면서는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웃음) 그냥 하루하루 사느라 바빠요. 오늘은 어디 마을까지 몇 시쯤 도착할 거고, 어디서 밥을 먹고, 숙소를 잡아서 자야 한다. 빨래는 여기서 못했으니 거기서 해야 한다. 내일은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 이것만 생각하기에도 바빠요. 기본으로 돌아가서 하루하루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게 돼요. 먹고, 자고, 입을 것. 삶이 단순해지니까 잡념이 사라지더라고요. 머리가 정화됐어요.
하루하루 오늘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고, 방향을 잘 설정해서 가니까 막막했지만 900km에 다다랐잖아요. 그 경험을 제 몸과 마음이 기억해요. 이 일을 하고 난 후의 저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겉으로 볼 때는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진짜 많이 달라졌어요.
융: 산티아고에서의 경험이 여러 일을 시작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혜민: 진짜 그래요. 막막할 때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이 있어요. 그럼 언젠가 원하는 곳에 닿을 거란 믿음도 생겼고요.
이전의 저는 제 자신에게 믿음이 부족했어요. 회사에서도 주눅 들고, 여기서 포기하면 실패라고 잘못 생각했어요. 자존감도 낮았고요. 회사를 나가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나오는 순간 ‘이게 다가 아니구나’를 느꼈어요. 길을 걸으면서 ‘내 힘으로 이만큼이나 갈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채워졌어요.
융: 어떤 일이든 ‘처음’은 ‘산티아고에서의 첫날’처럼 신나기도 하지만 힘들 때가 많잖아요. 시간이 흐를수록 요령이 생겼다는 말도 인상적이에요.
혜민: 무엇이든 ‘처음’ 해보면 아이가 걸음을 걷듯이 실수도 하고 그러잖아요. 시행착오를 겪는 건 당연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처음의 순간’도 하면 할수록 숙련돼요.
900KM에서 - 기획, 에디팅을 담당하는 혜민 & 영상, 디자인을 담당하는 현우
융: 숙련된다는 표현이 너무 좋아요. 산티아고를 가기 전부터 책 만들 생각이 있었어요?
혜민: 아니요. 자연스레 모인 기록으로 만들었어요. 그곳에서는 글을 쓰게 돼요. 안 쓸 수가 없어요. 제가 써둔 글이 있었고, 현우가 사진을 찍었어요. 처음에는 전시를 하고 싶었거든요. 결혼식을 안 올리고 간 거니까, 다녀와서 길을 펼쳐두고 전시하면서 고마운 사람들을 초대할 생각을 했어요. 막상 다녀오고 나니까 전시로 갈무리 하기에는 아쉬웠어요. 더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 제가 당장 만들 수 있는 게 책이더라고요.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 행진>은 처음에는 ISBN(국제 표준 도서 번호)도 없는 독립출판물로 만들었어요. 한 달만에 책이 다 팔리니까 주변에서 출판사를 차리라고 권유했어요. 그렇게 900KM(구백킬로미터)가 시작된 거예요.
융: 책도 백구 부부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거잖아요. 종이 넘기면서 감탄했거든요. 퀄리티가 너무 좋아요.
혜민: 그때 책을 직접 만든 게 처음이었어요. 책으로 글 쓰는 것도 처음이었고요. 그전에 에디터로서 회사에서 편집 안을 짜고, 기획하고, 취재하는 글쓰기는 많이 했죠. 그런데 출판까지 해보는 과정은 처음이었어요.
텀블벅에 올린 이후에 압박감이 들어서 울었어요.(웃음)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에디터로서의 글이 아니라 저의 삶이 담긴 에세이를 누가 본다고 생각하니까 잘 못 쓰겠는 거예요. 그런데 교정을 봐주는 언니가 글을 다 읽고 감동받았다고 장문으로 메일을 써줬어요. 그때도 엉엉 울고, 자신감을 다시 회복하고 책을 만들었어요.
에디터로서의 일 - 다양한 매거진 작업에 참여하고, 기업과 협업하기도 했다
융: 에디터는 항상 꿈꿔왔던 일이었어요?
혜민: 어렸을 때부터 계속 글을 썼어요. 대학도 ‘시'를 써서 문창과에 들어갔고요. 실기 비중이 높았거든요. 근데 사실 저는 문학 보다는 광고처럼 상업적 글쓰기가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광고 동아리도 만들어서 운영하다가 ‘에디터’를 알게 됐는데 저랑 잘 맞을 것 같았어요. 문학은 독자로서 남고 싶었고, 에디터로서 좋아하는 콘텐츠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융: 실제로 에디터가 됐을 때 기뻤겠네요.
혜민: 일이 많고 돈을 많이 버는 일도 아니지만 너무 재밌었어요. 900KM를 창업하기 전까지 6년 정도 회사를 다녔는데 계속 기획하고 쓰는 에디터 역할을 했어요. 디자인 회사의 기획 편집자로 일할 때는 여러 역할을 해야 했어요. 콘텐츠 기획뿐만 아니라 프로젝트 매니징을 하는 PM 역할을 맡으면서 예산 짜고, 견적 받고, 운영하고, 클라이언트들에게 PT를 하고, 세금계산서를 끊고. 그때 했던 일들이 지금 일에도 많이 도움이 돼요.
융: 정말 공감하는 게 회사에서 서류 작업만 할 때는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얻는 것이 뭘까 고민한 적이 있는데 나와보니까 그런 프로세스를 알게 된 것 자체가 제가 배운 거더라고요.
혜민: 맞아요. 계약서를 보는 방법도 회사 다닐 때 배웠어요. 프로세스를 알고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어요.
융: 혜민에게 제일 궁금했던 게 있어요. 원래부터 대안적인 삶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었어요?
혜민: 저도 제가 왜 이런 길을 가게 됐나 생각을 해봤어요.(웃음) 저는 제가 성실하게 세상이 시키는 대로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항상 마음에는 어떤 반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겉으로 막 표현하지는 않아도 속으로는 ‘이건 왜 이래야 하지?’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어요. 그런데 대학 친구들 만나서 얘기해보면 “너는 원래 마이웨이였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나 옳다고 믿는 것을 해야 하는 성향은 있었던 것 같아요.
융: 광고 동아리가 없다고 만드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혜민: 하하. 생각하면 해야 해요. 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바로 수긍하지 않고 고집이 있는 편이고요.
융: 그런 태도에서 좋은 질문이 나오나 봐요. 요즘사의 인터뷰들은 질문이 주옥같아요.
융: 그럼 산티아고에 다녀와서 900KM를 창업해 책을 내고, 요즘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혜민: 결혼식 대신에 산티아고를 다녀왔잖아요. 세상에 돌을 던지면서 판을 깨고 결혼했는데 돌아오니까 기성의 결혼 문화가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가족들이 유난스러운 것도 아니고 잘 대해 주시는 데 이전의 제 생활과는 그래도 너무 다른 거예요. 듣는 말도 달라지고. 제가 혼자 살 때는 부모님 뵈러 1년에 두 번 정도 내려갔는데, 갑자기 한 달에 한 번 내려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나는 조신한 며느리가 되어야 할 것만 같고, 제가 사는 세계가 급격히 변했어요. 거의 21세기에서 조선 시대로 간 것처럼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라는 의문이 생겼어요. 제가 느끼는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을 들여다보고, 그 질문에 관한 답을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요즘사’ 예요.
융: ‘요즘 것들’이란 단어에서 혜민이 아까 말한 반감이 떠오르네요.
혜민: 기성세대가 “요즘 것들은 이래서 안 돼"라고 하는 말의 반어법처럼 만들었어요. “그래도 요즘 것들은 이런 생각을 해"라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첫 프로젝트로 당시의 제가 느끼고 있던 게 ‘결혼 문화’니까 ‘우리처럼 되바라진 생각을 하는 부부’를 인터뷰해보기로 한 거예요.
처음 요즘사를 시작할 때 ‘결혼’ 얘기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큰 그림은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남들만큼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이 있는 것처럼 교육을 받잖아요. 정답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는데, 그 사례를 저도 직접 보면서 확신을 갖고 싶었던 것 같아요.
융: 글쓰기, 출판, 유튜브, 인터뷰, 강연... 그야말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다능인’ 같아요. 자기소개는 보통 어떻게 해요?
혜민: 간단히 소개할 때는 콘텐츠 스튜디오 900km를 운영하고 있고, ‘요즘 것들의 사생활’ 유튜브를 하고 있는 기획자이자 에디터 혜민이라고 해요.
융: 책에서 보니까 “그래서 본업이 뭐냐"라는 질문을 받았었다면서요. 자주 받는 질문이에요?
혜민: 은근히 있었어요. 그 질문 때문에 요즘사의 ‘먹고사니즘' 시리즈를 기획했어요. 지금은 그래도 콘텐츠를 쌓아가다 보니 예전보다는 봐주시는 분들도 많고, 책도 4권을 만들었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자기 소개할 때 이런 방향으로 일하고 싶다고 구구절절 얘기했어요. 처음에는 게스트 에디터로 외주 일도 많이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