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언니는 꼭 SIDE의 Explore, 탐험 섹션으로 인터뷰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빠키: 앗! 저는 탐구원이에요. 작업실 이름도 빠빠빠 탐구소. 그래서인지 무언가를 탐구하고 탐험하는 사람들을 좋아해요.
융: 그러니까요. 장르, 매체 구분 없이 다양한 세계를 탐험하고, 탐구하잖아요. 공간, 미술, 영상, 인터랙티브, 입체 설치, 브이제잉, 디제잉… 구분을 짓는 것이 무의미해 보여요. 언니가 활동한 게 얼마나 됐어요? 시작이 궁금해요.
빠키: 활동을 어디에다가 초점을 맞추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져요. 생각해보면 태어나는 것부터가 활동의 시작이에요. 어떤 것에 목적을 가지고 향해가는 순간부터 활동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자기 성향에 맞게 자신이 추구하는 지점을 따라가요. 작가로서 본격적인 시작이 언제부터였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과연 근본적인 내 활동이자 시작일까?’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라는 거죠.
융: 한 가지 시선으로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에 민감한 편인데 제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빠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을 따라가게 되어있는 거 같아요. 사람들을 사회적 기준으로 구분할 수도 있고, 시기적으로 학교나 회사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신을 정의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외적인 기준이 아니어도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따라 다양하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저 역시 여러 경험을 했지만, 창작 활동이 하나의 방식으로 규정되거나 구분 되지는 않았으면 해요.
사실 경계나 영역을 정의하는 것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구분 지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경험에 따라 상대적으로 구분 지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정의가 내려진 단위들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언어적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요. 작업과 시각적인 표현에 대해 굳이 경계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융: 학생 때 저는 미술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움이 있었어요. 마케팅을 알게 되면서 재밌을 것 같아서 선택했지만 여전히 미술에 미련이 남았다는 걸 느껴요. 언니는 불안한 적은 없었어요?
빠키: 하고 싶으면 하면 되죠. 미술가만 미술 하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항상 그냥 제가 원하는 지점을 향해서 갔어요.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가듯이 자연스럽게. 오히려 불안한 감정을 느낀 건 요즘 몇 년 사이인 것 같아요.
융: 어떤 면에서요?
빠키: 일에 대한 불안함이 아니라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한계 같은 거요. 시간이 흐르면서 이별, 죽음 등을 더 깊이 생각하게 돼요. 나는 그대로인데 상황은 계속 바뀌거든요. 그 상황을 마주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나?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유한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 태어나고 다시 돌아가는 이 과정이 유난히 짧게 느껴지면서 우리의 삶 자체가 항상 잠재된 불안과 불완전함 속에서 존재한다는 게 더 실감이 나요. 이때까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융: 상실감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 같아요. 나 또한 시간이 흐르며 앞으로 또 여러 일을 겪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지금 하는 이야기가 모두 언니의 작품과도 연결이 되네요.
<coexistence>
<반원 위의 양자 요동>
빠키: 생성 소멸 과정을 거치며 ‘순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이 작업의 시작점이에요. 그리고 순환에서도 여러 가지 관점이 있어요.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과 몸의 순환, 우주의 순환, 에너지의 흐름, 교감, 교류.. 이런 것들이요.
융: 삶의 에너지,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도 접근하고 있겠네요.
빠키: 네,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탄생과 소멸이라는 반복된 패턴, 우연과 필연 투성이인 우리 삶. 그러다가 느껴지는 존재의 무의미함 같은 것. 사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이런 세상에 태어나겠느냐고 물어본 적 없잖아요. 우리의 동의도 허락도 없이 우리는 단지 지금 이 세상에 던져진 거고요. 굳이 죽음을 슬프고 어둡게만 바라보지 않고 자연적인 순환처럼 본연의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해요.
어떻게든 지속해서 삶을 살게 해주는 반복적 에너지가 작품에서 보이는 컬러의 대비나 조형적인 패턴으로 시각적 언어를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무거운 이야기라 어둡게 표현될 수 있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밝은 에너지로 표현하는 것 같아요.
< What I dream >
융: 맞아요. 언니를 직접 만나기 전에 작품과 온라인을 통해서 볼 때도 그 에너지가 느껴졌거든요.
빠키: 죽음을 슬프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은 늘 같은 것이라는 믿음을 애써서 갖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존재하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영원히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지만 말이죠. 순환이죠. 작품에서도 보면, 제 주위에 마주하는 사물들을 선이나 면, 컬러들의 요소들로 분해하고 반복해서 패턴 이미지들을 만들어나가는데 이것도 또 다른 순환이에요. 어떤 작업은 모터를 이용한 움직임을 통해 이미지들이 연속적인 리듬을 만들고 확장해요. 마치 삶의 모든 것이 흘러가고 다시 되돌아오는 것처럼요.
이런 패턴들같이 우리가 어떤 시공간에 있든 동일한 요소의 반복이고 과거나 미래나 그 지점은 내가 어디에 눈을 두느냐에 따라 하나의 점(순간) 일뿐이라는 것이에요. 그 속에서 저는 시각적 유희를 만들어내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불안과 불규칙으로 가득한 무질서한 상태 속에서 시각적 유희인 ’ 놀이’를 저만의 의식(ritual)을 통해 규칙과 질서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거죠.
융: 놀이. 너무 좋은 키워드예요.
빠키: 네덜란드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유희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하는 게 있어요. 유희적 인간의 기원은 모든 문화가 놀이에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요. 사실 놀이는 종교, 일, 여가 등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잖아요.
“ 우리 인생에 느끼는 다양한 불안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개인적으로 이런 것들이 내적 자아의 행복을 좌우한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해왔어요. 결국, 인간은 "의식화된 놀이"를 통해 이런 자아의 불안을 해소해 보려 하지만, 결국 이런 시도들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지은 전시 제목입니다. “ - 개인전 <불완전한 장치> 중
< 불완전한 장치 >
< 우리는 매일 마주한다 >
융: 놀이와 순환. 작품에 관한 이야기지만, 언니가 살아온 방식이랑도 연결이 되네요.
빠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놀이’가 갖는 공동체적인 특성이 있어요. 어떤 측면에서는 의식(ritual)이 인간 본성 중의 하나인 자기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고 우연과 필연의 경험을 통한 믿음에 의해 시작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그러니까 불안을 빠키의 놀이라는 무언가의 의식(ritual)을 통해서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