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꿈이었던 아나운서가 되었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치켜세우는 직업을 내려놓고 새로운 길을 찾았다. 현재는 주 2일 아워홈의 전문 프리젠터로 활동하고, 나머지는 브랜드 스토리 개발 전문 그룹 필로스토리의 공동 대표로 활동한다. 채자영이라는 이름에 붙는 수식어는 여러 가지다. 유튜버, MC, 모더레이터, 강사, 버벌리스트, 한국 수사학회 교육이사, 그리고 엄마까지.
손가락을 다 접을 정도로 다양한 일을 하고 있지만, 모든 것이 "세상에 마땅히 전해져야 할 이야기를 말하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직접 만든 합성어 '스토리젠터(Storysenter)'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소개한다. 궁금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하면서도 조급해보이지 않는 이유가.
"8년 동안 160편의 글을 쓰는 과정에서 '모호함은 섬세함으로, 속상함은 당당함'으로 바뀌었다."
자영이 직접 쓰고, 엮고, 펴낸 책 <실전 프레젠테이션 이야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책을 덮고, 그와 더 깊은 대화를 나누며 이해하게 됐다. 지난 날들의 자영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고, 행동했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부지런히 기록했다. 그 기록을 통해 성장한 그는 이제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양한 형태의 '말하기'로 나누며 사람들의 가슴속 불씨를 일으키고 있다.
자영의 수많은 정체성 중에서도 가장 멋지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엄마로서의 모습
융: 지금은 “스토리젠터"로 활동하고 있지만, 아나운서 시절의 이야기도 궁금했어요. ‘말하기'를 항상 좋아했어요?
자영: 어렸을 때부터 꿈이 ‘아나운서’라고 답했어요. 말하는 걸 좋아하니까 “아나운서 해라" 툭툭 던지는 말을 받아들이고, 그 씨앗이 안에서 커졌던 거죠.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노래도 있잖아요.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서 국어국문학과와 방송 커뮤니케이션을 복수 전공했어요.
융: 어렸을 때부터 꿈이 명확한 편이었나 봐요.
자영: 어릴 때는 명확했는데 방송국에서 인턴을 하면서 방황이 시작됐어요.(웃음) 아나운서를 간접 체험한 직후부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혼란스러운 거예요. 본질적으로 ‘내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은데, 아나운서는 작가가 있고, 이미 정해진 내용을 잘 전달해야 한다는 역할이 커서 기대와 달랐어요.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기자일까? 피디일까? 이런 고민도 많이 했고요.
고민이 많아서 방송국과 대기업에서 대외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경험을 많이 해야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알 것 같았거든요. 그래도 방송국이 가장 생동감 넘치는 것 같았고,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마지노선을 정하고 도전했어요. “2년 후에도 아나운서가 안 되면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자” 마음먹고, 동생에게 돈을 빌려서 아나운서 아카데미에 등록했어요.
그런데 딱 그날 대외 활동할 때 만났던 국장님이 전화가 와서 “광고 PD 인턴 해볼래?” 이러는 거예요. 원더보이즈 필름이라는 프로덕션 회사였는데요, 주변에서도 좋은 회사라고 그러고, PD도 해보고 싶었으니까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간다고 하고 아카데미를 취소했죠.
융: 아나운서와 PD. 갈림길에 섰던 순간이네요. 이게 하루에 일어난 일이었던 거죠?
자영: 네.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포기했으니 회사에 가서 끝장을 보려고 했어요. 열심히 일했어요. 아무도 안 시켰는데 현장에 있는 쓰레기 다 줍고, CF 감독님이 “쟤 누구냐?”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열정을 다했죠.
광고 PD는 업의 특성상 밤새는 일이 많았는데, 저는 밤새는 건 잘 못하거든요. 제가 그 직업을 잘 모르고 일을 시작한 거죠. 인턴을 하는 동안 주말 포함해서 집에 들어간 날이 손에 꼽혀요. 제 능력으로 환경을 조절할 수 있었다면 버텨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두 달만에 다시 나가기로 결심했어요.
처음에 면접 볼 때 회사 대표님이 그랬거든요. “진짜 힘든데 버틸 수 있어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했죠. 그런데 그만두겠다고 말하려니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대표님이 뭐라고 할까. 그럴 줄 알았다고 하실까. 고민하면서 말씀드렸더니 대표님이 그러셨어요.
“자영아. 넌 어디 가서도 잘 될 거야. 나중에 내가 다시 부를 테니 그때 같이 일하자.”
그때 정말 놀라고 감동받았죠. 그 전에는 성과를 내야지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보고 계셨던 거예요. 태도로써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아직도 이 대표님이랑 연락하며 지내요.
융: 태도로 인정받았다는 말이 멋지고 공감 가요. 경력이 쌓일수록 결정적인 순간에 차이를 만드는 건 실력보다도 태도란 생각을 자주 하게 되거든요. 두 달 같이 일한 건데 인연이 참 신기해요.
자영: 그 고마운 말 덕분에 다시 힘이 생겨서 아나운서 학원을 다시 등록하고 열심히 했죠. 새벽 5-6시에 일어나서 신문 스터디하고, 연습하고.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열심히 하니까 배운 걸 실전에 쓰고 싶더라고요. 아직도 그 기분이 생각나요. 나는 준비가 됐다. 무대에 나가고 싶은데 왜 무대가 안 주어지는 걸까. 이런 마음이 드니까 오디션에 딱 붙더라고요. 열심히 해서 그런지 5개월 만에 데뷔를 하게 됐어요. 어릴 적 꿈을 이루고 처음으로 방송을 하게 됐는데… 그 일이 또 제가 생각한 거랑 좀 달랐죠.
아나운서 시절의 자영
융: 꿈을 이뤘다고 박수 칠 준비하고 있었는데요.(웃음)
자영: 방송에 나가기 위해 매일 화장을 2시간씩 받았어요. 생방송은 재밌는데 방송이 끝나면 마음이 힘들더라고요. 열심히 해서 만들어 낸 순간인데 무대를 충분히 즐기지 못했어요. 방송에 나갈 만큼 제가 단단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수원에 살아서 광역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요, 어느 날 미친 듯이 뛰어서 겨우 버스를 잡았는데 누가 자리를 양보해주더라고요. 그때 자리에 앉아서 가는데 화장 진하게 하고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제 모습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그 시절이 제일 힘들었어요. ‘사람 채자영'과 ‘직업인 채자영'이 동시에 성장하는 게 중요한데, 직업인으로서의 나는 위에 있고 인간 채자영이 그대로니까 그 괴리감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어요. 주변에서 “오오~ 아나운서!” 하는 말들도 불편했고요.
융: 오랜 기간 명확하게 꾸던 꿈을 노력해서 성취해냈는데 생각과는 달랐을 때 어땠을지 잘 상상이 안 가요.
자영: 그래서 아나운서를 그만둘 때 힘들었어요. 이미 많이 방황했고, 드디어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그만두려니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아나운서라고 사람들이 감탄하는 말들을 즐겼을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맞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봤어요. “내가 왜 아나운서를 꿈꿨을까?”
융: 좋아하는 일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느껴져요.
자영: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어서 많이 고민했어요.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단단해진 것 같아요.
고민을 거슬러 올라가니까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좋다고 확신했던 순간이 나오더라고요. CJ에서 대외 활동할 때 조별과제로 PT를 했어요. 발표하기 전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 엄청나게 연습하고 발표를 잘 해냈을 때의 성취감, 몸으로 느껴지는 관객들의 반응.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희열을 느꼈어요. 무대 위에 서는 게 좋다고 처음 감지한 순간이었죠.
교수님께 물었던 기억이 나요. PT 하는 게 너무 좋은데 프레젠테이션 하는 직업은 없나요? 교수님이 없다고 했거든요.(웃음) 그런데 제가 지금 그 일을 하고 있어요.
융: 그렇게 언젠가 과거의 점들이 연결이 되는 걸 보면 참 신기해요. 제가 인터뷰하는 분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고요.
자영: 꿈을 직업에 가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꿈을 물어보면 항상 아나운서요. PD요. 기자요. 이렇게 대답했는데 아나운서를 안 한다고 실패한 인생이 아니잖아요. 꿈을 못 이룬 인생도 아니고요. 단어로 정의 내리는 순간 그 단어에 갇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문장으로 풀어서 생각해봤어요.
“나의 말과 표현으로 다른 사람의 가슴에 불씨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자.”
이렇게 생각하니까 어떤 일이든 꿈이 될 수 있는 거예요. PD는 영상으로, 작가는 글로, 아나운서는 말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잖아요. 꿈을 직업에 가두지 않으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때 “프리젠터” 채용 공고를 발견했어요. PT 하는 직업이더라고요. 하고 싶은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지원했어요.
융: 프리젠터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거예요?
자영: 공정거래위원회 규율상 얼마 이상 금액이면 입찰을 내야 해요. 제안 설명회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데, 워낙 경쟁이 치열하니까 PT로도 경쟁이 오기 시작했고, 아워홈 중부지사 팀장님이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아나운서 출신을 정규직으로 채용해서 프리젠터로 해보자고요. 그래서 제가 프리젠터 일을 하게 된 거예요. 청주로 가야 했고 쉽진 않았어요. 아나운서 그만두고 청주에서 프리젠터 한다고 하면 사람들도 의아해했어요.
융: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그 결정 때문에 지금의 자영이 있네요. 청주에 오래 있었어요?
자영: 1년 8개월 있었어요. 입사할 때부터 서울 발령이 목표였는데 조직 안에는 다양한 상황이 존재하더라고요. 열심히 해도 멀리 있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나 고민할 때쯤 한 번씩 중요한 PT에 참석했어요. 작은 성공을 경험했기에 버텼던 것 같아요. 그리고 딴짓을 많이 했어요. 팟캐스트도 그때 시작한 거예요.
융: 정말 언제든 부지런히 계속 움직였네요.(웃음) 팟캐스트는 프레젠테이션이 주제였죠?
자영: 주변에 딴짓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지인의 권유로 프레젠테이션 관련 칼럼을 썼어요. 1년 뒤에 그 지인이 칼럼으로 팟캐스트를 해보라고 해서 등 떠밀리듯이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청취자가 많은 거예요. 다운로드가 1만 건 넘게 발생하고. 너무 신기해서 재미있게 했어요. 그때 “스토리젠터"라는 이름을 만들었어요.
융: 안 그래도 스토리젠터 이름의 유래가 궁금했어요.
자영: 친구들이 PT 할 때 뭐가 제일 중요한지 물어보면 늘 이렇게 답했어요. “PT 할 때는 발표자처럼 하면 안 되고, 내 이야기처럼 느껴져야 해.”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이 스토리와 프리젠터를 합쳐서 스토리젠터라고 붙여준 거죠.
처음에는 그 이름에 애정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수 그룹에서 큰 기획 강의를 하는데 5명의 연사를 불러서 포스터를 만들어줬거든요. 대표들 사이에 “스토리젠터 채자영" 이렇게 써준 거예요. 누가 불러줬을 때 이름이 된다고, 그때 저도 이 이름을 다시 보게 됐어요.
융: 유일한 이름이잖아요. 하나의 브랜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자영: 전문 프리젠터라는 이름만으로는 저를 설명하기 애매했어요. 처음에는 스토리젠터가 프리젠터보다도 작은 게 아닐까 고민했는데 제가 시야를 바꾸고 재해석을 하면 되더라고요.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말하고 전하는 사람. 이런 의미를 가지고 여전히 일이 들어와도 단순히 사회 보는 일보다는 모더레이터처럼 제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융: 청주에 있다는 거 말고 프리젠터로서의 일 자체는 잘 맞았어요?
자영: 네, 정말 재밌었어요. 저는 제가 빨리 질려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3년이 넘어갈 때쯤 깨달았어요. 잘 맞는 직업을 못 찾았던 거였어요. 오히려 처음에 힘들었던 거는 기존에 없던 직업이다 보니 회사에서도 저에게 어디까지 일을 맡겨야 하는지가 없었어요.
‘발표의 영역'만이 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회사에서는 영업, 제안서, 텔레마케팅을 다 시키는 거예요.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시선으로 봐주는 어른들이 계셨어요. 대외 활동을 하면서 만난 리더 분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발표만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제안서 다 쓰고 발표까지 잘하는 사람은 잘 없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태도를 바꿔서 2년 동안 영업, 텔레마케팅, 프레젠테이션을 전부 열심히 했어요. 그때 배운 게 진짜 많은 도움이 돼요. 현장까지 다 경험해봤으니까요.
융: 그렇게 잘 맞는 직업을 찾았는데 퇴사를 결심했어요.
자영: 5-6년 차 때 완전히 방전됐어요.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대학생 강의 등 외부 활동까지 했으니까요. 퇴사를 고민하면 사람들이 퇴사하고 뭐할 거냐고 꼭 물어보더라고요. 퇴사 후엔 더 대단한 일을 하길 바라는 것 같아서 부담감이 컸어요.
지칠 대로 지쳐서 바닥까지 체력이 없는 상태에서 파리로 여행을 갔는데 웬걸. 너무 행복한 거예요. 이런 삶을 위해 사는 건데. 더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퇴사하는 게 아닌데. 그냥 매일 더 행복할 수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파리에 다녀와서 일주일 뒤에 퇴사한다고 말한 거예요. (웃음)
그런데 그때도 확실하게 이야기한 게 있어요. 여전히 프리젠터로서의 일이 너무 좋았거든요. 이 일을 너무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다양한 일이 있다고, 회사에 있다는 이유로 하지 못하는 게 많아서 아쉽다고 말씀드렸어요. 제가 말씀드린 분이 당시 우리 부서의 총괄이었는데 지금 대표님이 되셨거든요. 그때 대표님이 했던 얘기가 또 감동이었어요. 원더보이즈 필름 대표님과 같은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자영이 너는 더 큰 일을 할 거야. 언젠가는 네가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갈 줄 알았어.”
전문 프리젠터 일을 못하게 되는 게 큰 고민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표님이 제안을 주셨어요. 그러면 정말 PT만 하는 거 어떠냐고요. 저야 너무 감사한 제안이었죠. 당시 부문장이었던 현 대표님이 회사 내부를 설득해서 새로운 형태의 계약을 하게 된 거예요. 정규직에서 자발적인 비정규직으로. 지금도 일주일에 2번, 프레젠테이션을 주 업무로 하며 출근하고 있어요.
융: 멋있는 리더와 어른들이 주변에 있는 게 너무 좋아요. 초기에 PT만 하길 원했던 때가 떠올라요. 오히려 영업, 제안서 등의 영역까지 최선을 다했던 그 2년의 기간이 있었기에 초기에 바랐던 대로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 그만둘 때는 이런 제안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자영: 전혀 생각하지 못했죠. 너무 큰 감동이었어요. 이런 어른들이 곁에 있다는 게 큰 행운이에요. 5년 동안 최선을 다한 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감사했어요. 어떤 곳에서든 최선을 다하면 그걸 보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태도가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융: 요즘 상사가 없는 환경에서 ‘잘하고 있는 건가? 계속하면 성장할 수 있나?’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프리젠터로 일하며 같은 일을 하는 선배나 상사가 없었던 거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스스로 성장하는 길을 찾았어요?
자영: 예전에는 직장에 제 롤모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회사 안에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을 찾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진 세상 같아요. 아워홈에서 저는 하나의 전문직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업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어요. 덩그러니 있으니 더 주체적으로 “전 이걸 잘해요. 여기까지 할게요.” 이야기했죠.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결과가 바로 나오고, 수주의 여부로 성과를 판명해요.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평가가 되는 건데 최종 결과를 저의 성과로 하기엔 억울하더라고요. PT는 잘했는데 수주가 안 되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저만의 성과를 측정하기 시작했어요. 프레젠테이션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설득이 됐는가를 저만의 성공의 척도로 잡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책으로 나온 <실전 프레젠테이션 이야기>를 지난 8년간 기록하면서 제가 성장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느꼈어요.
자영은 청주에서 힘들 때마다 노트 속에 부지런하게 자기만의 기록을 해왔다
융: 기록과 공유가 너무나 큰 차이를 만들죠. 돌아보며 알게 되는 것도 있고요.
자영: 맞아요. 제가 보려고 쓴 글인데, 공개로 글을 올리니 사람들이 저를 전문가라고 부르더라고요. 팟캐스트도 마찬가지예요. “전문 프리젠터"란 직업에 대해서 질문이 오면 팟캐스트 주소를 보내줘요. 그럼 그분들이 들어보고 “전문가시네요?”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그게 신기했어요.
융: 내가 아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당연하지 않죠. 내가 알고 있는 걸 나누는 게 중요해진 시대 같아요. 아나운서도, 프리젠터도 힘들게 얻어낸 일인데 그만두기를 결정했어요. 그만둬야 하는 시기인 걸 어떻게 알았어요? 노력해온 게 아까울 수도 있잖아요.
자영: 진짜 최선을 다 하면 미련이 안 남는다는 걸 알았어요. 포기도 용기예요. 진로를 정할 때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저에겐 선택과 포기였어요. 선택과 집중을 하면 포기하는 길도 생기는 건데, 왜 그건 아무도 안 알려주지? 내가 어른이 되면 포기하는 것도 다독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융: 그만두는 것도 용기란 말에 공감해요. 그 시점을 터닝포인트로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하죠.
자영: 힘들 때면 멘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물어봤어요. 마음이 괜찮은 날에는 사람들은 대답해요. “너는 잘할 것 같아.” 또 다른 날에는 마음이 불안해요. 울먹이면서 전화를 걸면 사람들이 그래요. “왜 그 길을 가려고 하냐.”
내 감정에 따라 나를 아끼는 사람들의 대답이 달라지더라고요. 답은 이미 제 안에 있는 거예요. 그 사실을 깨닫고 물어보기를 그만뒀어요. 대신 머릿속에 있는 걸 글로 펼치기 시작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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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퇴사를 한 뒤에 필로스토리라는 회사를 창업했어요. 자영의 시야가 확장되면서 “스토리젠터”란 이름의 의미도 진화하는 것 같아요. 필로스토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자영: 저는 유레카처럼 샤워할 때 아이디어가 많이 떠올라요. 어느 날 갑자기 목욕하다가 “스토리" 단어에 꽂힌 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질문을 품고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스토리. 스토리. 그 단어가 있었구나. 나는 이야기를 만들고 전하는 사람이니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쉽게 만들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끝에 김해리 공동 대표와 필로스토리를 만들었어요.
프리젠터로서의 채자영은 어떤 게 강점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자주 듣는 칭찬이 “자영이 PT는 자연스럽"다는 말이었거든요. 기획을 배워본 적은 없지만 국문학과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분석하고, 인문학과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길 좋아했어요. 그래서 인문학 중심으로 소설의 플로우를 짜듯이 프레젠테이션을 이야기의 구조로 기획한 거예요. 처음엔 PT에서 스토리가 중요해라고 했던 건데 “스토리"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모든 것에 적용이 가능하더라고요. 비즈니스 상에서 가장 많이 스토리가 쓰이는 곳을 보니 브랜드 스토리였고 그래서 브랜딩 공부도 시작한 거예요.
융: 브랜딩에 관심을 가진 것도 스토리 때문이었군요. 수사학회도 그래서 관심을 가진 거예요?
자영: 네, 하하. 대학원을 갈까 고민했던 시기가 있어요. 스토리텔링의 본질과 이론이 궁금했거든요. 영화학과, 브랜딩 등 어떤 학문을 배우면 좋을지 찾아보다가 ‘레토릭(rhetoric)'이라는 책을 읽고, 수사학을 발견했어요. 제가 찾던 학문이 수사학이었어요.
* 수사학(rhetoric): 설득의 수단으로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 특히 대중 연설의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
검색 끝에 한국 수사학회라는 홈페이지를 찾아냈고, 거기 나와있는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어요. 저는 현장에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인데 수사학이 너무 배우고 싶다고, 어딜 가야 배울 수 있냐고 물었죠. 그러고 답장이 왔어요. “한국외대 나민구 교수님을 찾아가 보시오.” 이렇게요. 마치 고수를 찾아가라는 것처럼.
융: 너무 재밌고 한편으론 대단해요. 그런 메일을 보낸 사람 자영이 유일했을 것 같아요.
자영: 교수님이 엄청 반갑게 맞아주면서 수사학 배우고 싶다고 온 젊은이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두 시간 동안 저에게 수사학이 뭔지 논문 다 꺼내가며 설명해주시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더 감동이었던 건, 대학원 오지 말라고, 자영 씨는 현장에서 배우고, 우리는 이론을 배우고. 서로 배운 걸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2021년부터는 한국수사학회 교육이사로 임명받았다
융: 아까도 말했지만 주변에 멋있는 어른들이 많네요. 저도 벌써 궁금하거든요. 그분들과 우리 사이의 전달자가 필요한 것 같아요.
자영: 그래서 2017년부터 수사학회에 나가기 시작한 거예요. 교수님들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저는 입도 뻥긋 안 하고 메모만 하다가 와요. 철학 공부하시는 분들이니까 귀곡자, 공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넘나들거든요. 어쩌다 보니 2년 전에 수사학회 홍보이사가 됐고, 이번에 교육이사가 됐어요. 살아있는 인문학이라서 교수님들의 이야기를 일반인들이 듣게 해주고 싶어요.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판을 짜고 싶어요.
융: 앞으로가 기대되고 저도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네요. 그만두고, 새로운 문을 두드리고, 창업하고, 몰랐던 사람들과 연결되고. 자영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궁금해요.
자영: 저는 도움 요청을 잘하는 사람 같아요.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하고요. 제가 다양한 일을 하니까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꼭 그렇진 않거든요. 다양한 일을 하는 것과 일을 많이 하는 것은 또 다른 개념이에요. 인생을 통틀어서 저의 WHY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힘들 때마다 돌아가게 되는 문구예요.
“내 안에서 솟아 나오는 것. 나는 그것을 살아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소설 <데미안>의 문장으로 다 해결이 돼요. 그냥 제 안에서 나오는 솔직한 욕구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실현하고 싶어요.
융: 너무 좋아요. 그 일은 문장에서도 말하듯,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자영: 맞아요.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려면 건강해야 해요. 체력뿐만 아니라 마음의 근육도 단단해야 해요.
융: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이야기가 또 누군가에겐 가슴속 불씨를 일으킬 거라 믿어요. 사이더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자영: 저는 스토리젠터가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고 생각해요. 프리젠터가 주어진 일이었지만, 그걸 내 방식대로 다시 해석하고, 이름을 붙여주는 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었어요. 내가 나한테 이름을 붙여주는 게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이름을 어느 순간 누가 불러줄 때 또 새로운 의미가 생기거든요.
내가 나의 일을 주체적으로 재해석하고, 나만의 성과를 측정해보세요. 사회나 일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거 말고, 나에게 중요한 기준을 만들어보세요.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어요.
Drawing for SIDERS
누군가의 진심은 말보다는 태도와 행동에서 마음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채자영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말하기의 기술까지 가졌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환한 미소로 섬세하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전하고, 누군가의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사람이든 브랜드든 모래 알 속에 감춰진 자기만의 진주를 찾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돕는다.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공기를 감싸듯 부드럽게 상대를 휘어잡고, 명확하게 안내하고, 마음을 건들인다.
자영이 과거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다는 말. "방황은 당연한 거니까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나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주고 싶은 한 마디이기도 하다. 자영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누군가에게 건네볼 용기를,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키워갈 수 있다면 좋겠다.
채자영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storysenter_jy
채자영 유튜브:
<실전 프레젠테이션 이야기>:
해보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요!
SIDE에선 의심 대신 응원을,
현실적인 이유로 반대하기 전에
함께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다양한 색깔을 지닌 여러분의 스펙트럼이 펼쳐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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