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E
마음껏 서툴러도 되는
곳에서 애정을 재봉하는 취미 수집가 수지  
취미 수집가 수지


인터뷰이: 수지 | 인터뷰어: 송모연 | 사진: 백진선 | 영상: 이수현

별생각 없이 인스타그램을 내리다가 여행지에서 산 비즈로 목걸이를 만드는 영상을 마주쳤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으로서 지나치기 어려웠다. 여행지의 추억을 목걸이에 담는다니. 기념품을 구매하는 대신 기념품의 재료를 사서 직접 만든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큰 고민 없이 면세점에서 가족에게 가져다줄 간식거리를 사던 내 모습이 조금 부끄러웠다.


수지는 누구인가. 잘하는 게 많은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직접 이름을 만들었다. 취미 수집가. 취미(趣味)의 사전적 정의는 세 가지다.「1」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2」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3」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 그리고 수집(蒐集)이란 취미나 연구를 위하여 여러 가지 물건이나 재료를 찾아 모으는 것.


세상이 이렇게 빨랐던 적이 없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배경과 전경이 아주 빠르게 움직인다. 달려도 오히려 뒤처지는 것 같다. AI가 인간의 전문성의 많은 부분을 가져가 버린 것만 같다. 그럼 그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일을 즐기는 것 그 자체. 혹은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혹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힘. 감흥을 느끼고, 느끼게 하는 것. 나를 포함하여, 매번 새롭고 서툰 것이 많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것. 취미 수집가라는 이름은 지금 이 시대에 그래서 더 선명하게 들린다.

모연: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는 보통 어떻게 소개하세요?


수지: 저는 재봉도 하고, 디자인도 하고, 취미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수지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저를 수식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 그냥 학생입니다, 하고 말았어요. 학생이 아니게 된 후로는 디자이너입니다, 라고 했고요. 그러면 꼭 무슨 디자인이요? 하고 묻더라고요. 브랜딩도 하고 UX/UI도 하고 편집디자인, 모션그래픽도 할 줄 아는데 무슨 디자이너라고 답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수지라고 소개하고 말았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취미 수집가라는 단어가 떠올랐어요. 모든 직업은 누군가가 만들어 이름 붙인 것들이잖아요. 그러면 나도 내가 하는 것을 다 담을 수 있는 직업을 그냥 만들어버리면 어떨까 했어요.


모연: 요즘 하루를 어떻게 채우고 계세요?


수지: 올해는 디자인 일은 내려놓고 크리에이터로서의 삶에만 90% 이상 집중하고 있어요. 휴일에는 동네 카페에 다녀오거나, 산책하거나, 재료를 디깅 하러 다녀요. 최근에는 베이스를 새로 배우기 시작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과 합주를 다니고 있고요.


모연: 사이드 매거진 인터뷰에 응해주신 이유가 궁금해요.

수지: 19~20년도 사이에 코리빙하우스에 살았어요. 그때 함께 살던 친구가 알려줘서 사이드 뉴스레터를 구독했어요. 그 코리빙하우스 지하에 라이브러리가 있었는데 거기에 『모든 것이 되는 법』이란 책이 있었어요. 그 책을 읽고 다능인이란 개념을 알게 됐고, 정말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어요. 사이드도 그 책의 다능인이라는 개념에서 시작되었다고 들었는데, 이 세상 많은 다능인들의 이야기를 찾고 담는 여정들이 멋져 보였고, 그런 사이드에 제 이야기도 공유할 수 있다는 마음에 너무 기뻤어요.

 


스스로를 명명하기 어려울 때, 그러니까…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는데, 꼭 하나로만 설명해야 하나? 고민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쩌다 다능인이라는 단어를 만난다. 이름이 없어서 헤매던 길은 불리는 순간 길이 된다. 수지가 다능인이라는 단어에서 영감받아 취미 수집가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만든 것처럼, 누군가는 취미 수집가라는 말을 듣고 처음으로 자신의 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각자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타이틀이 많아질수록, 보이지 않던 길들이 하나씩 이름을 얻는다.

굳이, 직접, 손으로


모연: 모니터 앞에 있을 때랑 재봉틀 앞에 있을 때, 어떻게 달라요?


수지: 재봉틀 앞의 저는 좀 더 자유롭고 직감과 본능을 따라요. 패턴도 없이 그냥 일단 만들고 싶고 삘 받으면 자르고. 낮이고 밤이고 만들고 싶으면 당장 재봉틀 전원을 켜고요. 입어보고 뭔가 이상하면 수정하고. 좀 실수해서 우글거려도 괜찮아 안 보여, 하고 마무리해요. 모니터 앞의 저는 좀 더 완벽주의에 가까워요. 저장도 자주 누르고 여러 버전의 히스토리도 저장해두고요. 할 일도 계획적으로 처리하고요.


모연: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게 언제부터였어요?


수지: 제일 처음 기억은 엄마랑 주름지 꽃 만들기예요. 어머니가 꽃집에서 일감을 받아와 집에서 알바를 하셨는데, 어린 저와 동생한테 소일거리를 시키셨거든요. 만들기 자체보다 엄마랑 같이 보내는 시간이 좋았어요. 조금 크고 나서는 종이접기 책을 서점 갈 때마다 사서 이것저것 만들었는데, 좀 난이도 있고 독특한 것들을 좋아했어요. 클레이나 지점토로 미니어처랑 피규어 만들기도 했어요. 친구들한테 가져가면 신기해하고, 선물하면 좋아하니까 더 친해지고 싶어서 계속 뭔가를 만들었어요.


모연: 90년대생이면 디지털로도 많이 넘어갔을 텐데요.


수지: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셨던 아버지 옆에서 어깨너머로 포토샵도 다뤄보고, 다음 카페 ‘장미가족의 태그교실’에서 동영상 꼬랑지도 만들고, 태블릿 펜으로 그림도 많이 그렸어요. 자연스럽게 손으로 만드는 것보다 디지털 결과물이 많아지고, 어른이 되고 나서는 손에 잡히지 않는 디지털 작업을 업으로 하다 보니까, 물성이 있는 결과물, 손으로 만드는 시간이 더 필요했어요.


모연: 지금도 그 연장선인가요?


수지: 직접 만든 물건은 물건으로만 남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연결점이 된다는 게 제가 가장 사랑하는 부분이에요. 만든 물건엔 이야기가 생기고, 제 마음과 생각이 담겨 있거든요. 어릴 때도 지금도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건 곁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에요.


모연: 여행지 비즈로 목걸이를 만드는 것도요?


수지: 여행을 가면 꼭 그 지역에 있는 빈티지 숍이나 플리마켓을 구경해요. 처음엔 물건들을 기념품으로 사 오곤 했는데, 결국은 그 여행에서 내가 뭘 경험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자랑하고 싶었어요. 관람자로서의 결과물이 아니라 참여자로서 기념품을 남기고 싶어서요. 만드는 걸 좋아하고, 낯선 도시에도 재료는 가득할 테니 비즈나 원단 같은 것들을 구매했어요. 만든 물건을 착용하고 나가면 친구들은 또 궁금해하거든요. 그럼 자연스럽게 여행 이야기도 할 수 있고요.


모연: AI로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시대잖아요. 그래도 굳이 손으로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수지: 저는 비교적 제한적인 형태로 AI를 사용하고 있어요. 0에서 1을 만드는 것은 여전히 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더 차별점이 있다고 생각해서요. AI나 알고리즘은 결국 다수가 반응하고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데이터 기반으로 보여주는 거잖아요. 근데 제가 하고 싶고 잘하는 건, 대부분이 좋아한다고 검증된 것이 아닌 낯설지만 재밌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붙여두니 좋은 것들을 찾아내 연결 짓는 일이에요. 뜬금없이 농기구를 연결해 호미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스튜디오 이름을 짓자고 하는 건, 아직은 사람만이 가능한 연결점 같아요.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하고 의미와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 어찌 보면 직감과 직관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어요.


모연: AI 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있을까요?


수지: 점점 적당한 결과물들이 세상에 많아지는 것 같아요. 도전과 실패의 경험을 통해 끈기 있게 체득하기보다는, 뭐든 빠르게 실행하고 빠르게 포기하고 적당한 결과물에도 만족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시도와 도전이 많아짐과 별개로 지속하는 힘은 적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손으로 만드는 과정이 요즘 더 좋아요. 실패하면 수습하는 데 오래 걸리고, 끈기 있게 다시 도전해야 하거든요. 귀찮고 번거롭고 하기 싫지만, 완성하고 나면 시간을 들인 만큼 어떤 형태로든 그 결과와 보상이 된다는 걸 느끼거든요.


한편으로는 이렇게나 빠르게 성장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해요. 이미 세상은 충분히 발전했으니까요. 앞으로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어떤 삶의 기준으로 살아가게 될지 걱정도 기대도 됩니다.


모연: AI 시대에 잃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요?


수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연민하는 마음이요. 인간은 결국 모든 걸 사랑하기 때문에 AI와 로봇조차도 사랑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어요. 군대에서 지뢰를 찾기 위해 투입하는 강아지 로봇을 만들었는데, 그 로봇을 훈련시키던 군인이 강아지 로봇이 투입되자마자 폭발하는 걸 보면서 슬퍼했대요. 인간은 강아지 로봇마저도 사랑하는 거죠. 


결국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관심, 우리가 더 어떻게 잘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마음이 AI 사용에 대한 윤리를 만들고 가이드를 만들 거라고 생각해요. 도구로서 잘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이걸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어떤 가치를 줄 것인지 본질적인 것들을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결국 사랑이다, 모든 것은.



그림을 그린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창작 활동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알게 모르게 쌓인 재료들이 어느 순간 탁 하고 연결되면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할 것 같다는,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느낌. 그 직감은 첨예한 설계나 계산이 아니라 개인에게 쌓인 맥락과 경험에서 나온다.


그런 재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결되기 위해 활용한다는 것은 무척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충분히 들이는 것. 손에서 나온 결과물을 그 사람 곁에 두는 것. 엄마와 함께 꽃을 만들던 시간부터, 친구들에게 선물하던 피규어까지. 수지에게 만드는 행위는 종종 누군가를 향해 있었다. 


서툰 영역에서 찾는 재미

모연: 커리어가 꽤 다양하게 흘러왔어요.


수지: 어쩌다 보니 지금이 됐어요. 책을 만들고 싶어서 독립 출판을 하고 편집 디자이너로 일했고요. 학생 때는 미디어아트에 빠져서 코딩하고 설치 작업도 했어요. 디자인 외주도 종종 했어요. 그러다 코리빙하우스에서 만난 개발자 친구가 회사를 차리자고 제안했고, 2020년에 디자인 개발 에이전시를 공동 창업했어요. 3년간 팀원이 50명이 되는 성장도 했고, 운이 좋게 M&A도 경험했어요. 어쩌다 보니 발을 들였다가 운이 좋아 잘 풀린 케이스예요.


모연: 근데 번아웃이 왔다고요.


수지: 힘들어서가 아니라 쉬워져서요. 팀이 커지고 시스템이 잡히니, 어떤 일이 들어와도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 게 눈에 보였어요. 누군가는 10~20년 걸려 좇을 커리어 목표에 운이 좋게도 너무 빨리 도달해 버린 거예요. 내가 계속 배우고 있다고 느끼는지, 재미있어서 잠이 안 오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어요. 제가 롤 모델로 생각하던 분들의 넥스트 스텝도 C 레벨 혹은 창업이었어요. 근데 저는 그걸 이미 다 해버린 거잖아요. 이다음 성장점은 어디일까. 꼭 성장해야 하나. 그런 혼란한 마음들이 계속 충돌했어요.


모연: 쉬워지면 번아웃이 오는 건가요?


수지: 항상 그런 인과관계가 있진 않지만 대체로 재미를 잃으면 의욕을 잃고, 그 재미는 ‘새로운 배움'에서 올 때가 많았어요. 번아웃은 아무래도 목표에 다다라서 더 이상 성장점 없이 ‘루틴하게 지속되는 일’에 매너리즘을 느낀 게 크겠죠. 완전 초보가 돼서 부끄러울 수준인 것들에 흥미를 느껴요.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진 제 모습을 발견하는 게 좋아요. 내가 시간을 들여서 했을 때 변화한 스스로가 체감되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뭐가 되겠다 싶으면 흥미가 사그라들어요.


모연: 그래서 나온 건가요?


수지: 저는 동시에 여러 직업을 갖기보단, A에서 B로 챕터처럼 커리어를 바꾸는 사람이거든요. 디자이너라는 커리어에서의 목표를 이루고 나니까 그다음이 뭘까, 잘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멈추고 싶다는 생각으로 3년간 만들고 운영하던 팀에서 나왔어요. 1년쯤 쉬다가 UX/UI 멘토링 프로그램도 해봤고요. 대단하고 멋진 팀장님들과 멘티분들께 많은 걸 배우고 느꼈어요. 한편으론 확실하게 깨닫는 계기가 됐어요. 아 이제 UX/UI에서 다음 챕터로 넘어갈 때가 된 것 같다고. 결국 모든 것은 재밌겠다로 시작해서 이런 걸 배웠다로 아카이빙 하는 게 제 삶을 연결 짓는 동력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모연: 릴스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수지: 질투, 빙고, 느낌표 이렇게 세 가지로 답할게요. 


첫 번째로 제 주변 친구들이 SNS 콘텐츠를 많이들 시작했어요. 저는 평소에 응원과 칭찬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응원보다 질투가 나는 거예요. 그때 내가 이걸 해야 하는 사람이란 걸 느꼈어요. 두 번째로는 신년에 5X5 목표 빙고에 적은 목표 중 하나가 콘텐츠 시작하기였어요. 빙고 한 칸도 채울 겸 시작을 결심한 것도 있고요. 세 번째로는 느낌표. 남들은 이걸 이 정도까지 안 한다고? 다른 사람들은 옷을 안 만들어 입어? 리폼을 안 해? 취미가 이렇게 안 많아? 이 깨달음이 제 느낌표였습니다.


결국은 콘텐츠라는 게 오랫동안 내가 즐겁게 지속할 수 있는 주제여야 해요. 내일은 어떤 얘기 하지, 소재가 떨어질까 불안하고 스트레스받지 않는, 자발적으로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 것이 저에겐 취미생활이었고, 다능인으로서의 삶과 일을 만들어준 연결점이었거든요. 그래서 이 과정을 콘텐츠로 기록해 보자 결심하게 됐어요.


모연: 크리에이터 이후의 넥스트 스텝은 어떤 건가요?


수지: 제가 그동안 했던 경험들이 지금 제가 콘텐츠를 만드는 데 다 쓰이고 있어요. 디자인 경험이 영상 만들 때 쓰이고, 업무적인 커뮤니케이션 경험도 크리에이터 협업에 쓰이고요. 


저는 결국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초등학생 때 버킷 리스트에 “온 세상의 모든 또라이들을 다 만나자”라고 썼을 정도로요. 한 곳에 고여버린 생각을 가지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나이나 직업을 가리지 않고 친구가 되는 게 좋아요. 60대인 친구도 있어요. 아무래도 회사 안에 있으면 네트워킹 대부분이 같은 IT 업계 사람들일 때가 많았거든요. 다양한 자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고, 콘텐츠를 하면서부터는 그런 분들을 좀 더 많이 만나게 됐어요. 이렇게 사이드도 만나게 됐고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거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목표로 살아가는지 듣는 게 재미있어요. 저도 그걸 완전히 찾진 못했거든요.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재밌기도 하고요. 



너무 쉬워지는 것, 너무 빨라지는 것, 너무 익숙해지는 것. 그렇게 한 곳에 고이는 것을 경계한다. 서툰 환경에 나를 두고, 그곳에서 새롭게 변화하고 성장하는 스스로를 경험한다. 결국엔 나 스스로와 타인의 삶을 이해하면서 더 넓은 세상을 일군다.


디자이너로서 만들고 운영하고 M&A까지 한 회사를 뒤로하고 나오는 건 커다란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 무게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세상의 다양한 또라이를 만나고 싶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한다. 너무나 매력적인 의사결정이다. 나 또한 스스로 또라이라고 밝히며 수지의 세계 확장에 일조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파도가 가라앉을 때까지

모연: 스스로 경주마 같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수지: 한 번 꽂히면 앞만 보고 달려요. 학생 때는 밤새워 동이 틀 때까지 뭘 만들곤 했는데, 끼니도 걸러서 부모님이 식사와 과일 같은 것들을 작업 방에 넣어주셨어요. 올인하는 성향의 반대급부로 아주 빨리 무언가에 질려버리기도 해요. 대체로 3개월 정도면 흥미를 잃어요.


모연: 영상을 거의 3일에 한 번꼴로 올리시는데, 동력이 어디서 나와요?


수지: 완전히 도파민이에요. 빨리 만들고, 올리고, 자랑하고, 반응을 보고, 소통하고 싶어요. 특히 영상에서 시도해 보고 싶은 게 많아요. 릴스를 보면서 레퍼런스도 정말 많이 접하게 되는데 신기한 편집 기법이 있으면 내 영상에도 적용해 보고 싶거든요. 멋진 영상을 올려야지 보다는 내 배움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니까 재밌게 계속하게 돼요.


모연: 속도를 조절하시기도 하나요?

수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이 일은 정말 오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빨리 가다가는 3개월이면 질리겠더라고요. 그래서 한 주에 한 개만 올리자고 정했어요. 즉흥적이고 도파민에 가득 찬 저를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있어요.


영상 편집이 끝나면, 당장 올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기다렸다가 다음 날 올려요. 감정의 파도가 가라앉고 올리면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거든요. 바로 올리면 사람들이 반응을 신경 쓰게 돼요. 하루 지나고 올리면 그냥 이 콘텐츠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들고 좋아요. 사실 제 콘텐츠를 제가 덕질해요. 수십 번씩 돌려봐요.


또… 사고 싶은 게 생기면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며칠 뒤에도 사고 싶은 마음이 들면 사요. 좋아하는 것들의 관심사가 변하고 흥미가 사그라드는 것들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두는 편이에요. 마음이나 감정을 제어하기보다는 흐르는 대로 바라보고 최선을 다하려 할 뿐이에요.


모연: 기록을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해오셨더라고요.


수지: 아주 어릴 땐 먹어 치우듯이 장르 불문 다양한 이야기와 책을 읽는 데 몰두했어요. 청소년기부터 20대 초중반까지는 그 먹어 치운 문장들을 글로 마구 쏟아냈고요. 그 시기의 저는 내면의 감정과 고통을 ‘적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글로 쏟아내던 아이였어요. 의식적으로 기록했다기보단, 부끄러울 정도로 날 것들을 나도 모르게 넘쳐흘러 쏟아냈어요.


지금은 행복이 가득 찬 것일지, 어른이 되어 조금은 덜 예민하고 무감각해진 것일지, 혹은 너무 많이 다 쏟아내어 마음의 글 곳간이 텅 비어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글은 잘 써지지 않아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때 다 했고, 이제야 나와 세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됐나 봐요.


그래서 지금의 저에게 기록은 그냥, 제가 저 스스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식이에요. 어찌 보면 저에게 최애는 저 자신이라서, 덕질하는 마음으로 기록해요. 저는 제가 만든 것들이 진짜 너무 재밌고 좋거든요.



모연: 실패한 적도 있나요?


수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 이거 실패했고 망했어, 라고 해버리면 그렇게 끝나는데, 지금은 좀 실수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하면 되겠네, 라고 하면 그건 과정 속에 있는 거니까요. 배운 점을 찾는다면 더 이상 실패가 아니에요. 제 콘텐츠 속에는 다 괜찮아 보이는 완성품들만 있지만, 그냥 보여주지 않을 뿐, 자세히 보면 바느질도 서툰 부분이 많아요.


모연: 자신만의 속도를 찾으려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수지: 명사가 아닌, 삶의 동사들을 많이 찾았으면 해요. 방향도, 속도도, 시작점조차도, 동사만 있다면 언제든 문장을 만들 수 있어요. 누군가는 평생에 걸려 그 문장을 찾기도, 누군가는 아주 일찍 찾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동사들이 있다면 언젠가 그 문장을 마무리 짓고 다음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어요. 저도 이제 겨우 몇 가지를 찾기 시작했어요. 재미있는 것들을 경험하고 연결하고 공유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현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는 것. 지금은 이 문장들을 오랫동안 재밌게 써 내려가고 싶어요!

세상의 속도에 맞추다 보면 내 안의 사랑과 연민을 잘 조명하지 않게 된다. 나의 사랑과 연민보다 세상에는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착각하면서. 그러다 보면 나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이 정작 배경으로 밀린다. 나의 사랑과 우정이 자꾸 일과 성과에 밀려 뒷전이 된다. 중심을 세상에서 나로 가져오면, 대단한 성과보다도 나를 응원해 주는 가족과 친구와 동료가 보인다. 


시간은 나에게 너무나 비싼 자원이라서 자꾸 시간 대신 돈을 쓴다. 사랑하는 사람한테도 그렇다. 고민하는 대신 값이 나가는 선물을 산다. 정성껏 선물을 포장하는 대신 몇천 원 더 주고 포장 서비스를 맡긴다. AI가 시간을 참 많이 아껴준다는데 어쩐지 나는 이전보다 자꾸 바빠진다. AI가 아껴준 시간으로 더 좋은 것, 더 큰 것들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그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악한 코스터를 떠주고 싶다. 선물을 고르고 포장하는 데 쓰고 싶다. 친구를 사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수지는 여전히 동사를 찾는 중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미 널린 동사들이 있는데 굳이 나만의 동사를 찾는다. AI는 한 번에 백 개 천 개 넘는 동사를 추천해 줄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내 안에 쌓아온 동사들을 직접 고민하고 싶다. 여러 사람의 영향을 받아 기워냈을 그 동사를 또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 마음껏 망설이고, 마음껏 낭비하고, 마음껏 서툴게. 마음껏 돌아가면서.






해보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요!


SIDE에선 의심 대신 응원을,
현실적인 이유로 반대하기 전에
함께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다양한 색깔을 지닌 여러분의 스펙트럼이 펼쳐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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