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X 슈보스타 | EXPL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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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취향이 만들어준 나만의 독립적인 색깔 
가슴을 뛰게 하는 일에 움직이는, 슈보스타

“버닝맨 ‘마얀 워리어’에서 음악을 튼 최초의 한국인 DJ야.”

“대박. 미쳤다.”

 

슈보스타(이하 슈보)를 처음 만나러 가던 날 친구와 나눈 대화다. 내 반응의 맥락을 위해 버닝맨과 마얀 워리어를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이미지 크레딧: Mckay Jaffe


미국 네바다 주에 ‘블랙록시티'라고 부르는 사막에서 1년에 일주일간 도시가 생긴다. 일주일 내내 음악이 가득하고 인터랙티브한 예술작품이 곳곳에 설치되어 사진만 보면 페스티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버닝맨은 단순한 페스티벌은 아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모이지만 라인업도 존재하지 않고, 나무로 만들어진 구조물은 일주일의 끝에 가면 불로 태워진다. 버닝맨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수만 명이 단체로 실험해보는 창의적인 공동체에 가깝다. 인터넷도 안 터지고,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은 커피와 얼음뿐이다. 사막에서 일주일간 생존하기 위한 모든 것을 스스로 챙겨가고, 내가 만든 쓰레기는 머리카락 한올까지도 전부 다 수거해와야 한다. 티켓을 구하기도 어려워서 모두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인생이 바뀔 정도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버닝맨이 더 궁금한 분들은 2017년에 썼던 이 글을 추천합니다.)


버닝맨에서 디제잉을 했다는 이력도 놀라웠지만, ‘마얀 워리어’에서 틀었다는 얘기를 듣고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버닝맨에는 매드 맥스에 나올법한 수많은 아트카(Art Car)가 사막 위를 돌아다니는데, 그 위에서 DJ들이 음악을 틀어 ‘움직이는 클럽’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버너들은 사막에서 놀다가 어느 순간에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마얀 워리어를 찾아간다. 마얀 워리어는 세계의 탑 DJ들이 음악을 틀고, 아트카에 탑재된 기술도 예술이어서(멀리서도 반짝이는 레이저를 보고 찾아갈 수 있다) 사막 위를 돌아다니는 수백 개의 아트카 중에서도 가장 명성이 높다. 



그렇게 기대감을 안고 처음 만난 슈보는 정이 많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우주와 닮은 음악을 틀고,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좋아하고 ‘스페이스 오디세이'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를 보고, 처음에는 입덕 하다시피 ‘아티스트 슈보’의 팬이 되었다. 친한 친구가 된 지금은, 사람으로서 슈보의 팬이 되었다. 

 

컴퓨터 게임을 만들고, 음악을 독학하고, 조향사를 꿈꾸던 아이가 멕시코 시티에서 살며 유럽과 남미의 다양한 도시를 투어 하는 세계적인 DJ로 발돋움하기까지. 슈보가 깊이 탐험해본 다양한 세계를 사이더들에게 소개할 수 있어 무척 기쁘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DJ, 슈보스타

학창 시절, 여러 가지 취향의 시작

융: 슈보의 전공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전공이 뭐였죠?

 

슈보: 화학이랑 철학이요. 

 

융: 맞다. 어떻게 그 두 전공을 선택하게 된 거예요?

 

슈보: 고등학생 때 향수를 모으는 게 취미였어요. 고등학교에서는 컴퓨터 게임을 전공했는데, 향수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융: 고등학교에서 컴퓨터 게임 전공이요? 잠깐만요. 이것도 설명이 필요한데요.

 

슈보: 그럼 중학교로 가볼까요.(웃음) 중학교 때 제가 너무 평범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TV를 보고 ‘대안 학교’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학생들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대안 학교를 마음에 품고 있다가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의 입시생 모집 전단지를 보게 됐고, 이곳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제가 그때 컴퓨터를 좋아했거든요.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4개의 과가 있었어요. 만화과, 애니메이션과, 영상 연출과, 컴퓨터 게임과. 그림도 좋아하긴 했지만 저는 컴퓨터 게임에 잘 맞을 것 같아서 책을 사서 혼자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때 간단한 게임을 만들어서 고등학교에 입학한 거예요.

 

융: 와. 저는 대안 학교의 존재도 사회로 나오고 알았는데... 중학생 때의 저는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았던 것 같은데 슈보는 일찍부터 고민했네요. 

 

슈보: 근데 또 진학해서 컴퓨터 게임 제작을 배우는데 계속 앉아서 컴퓨터를 두들기는 게 제 취향은 아니더라고요. 우리 과에 컴퓨터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기도 했고요. 컴퓨터 게임에도 음악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음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영상 연출과 선생님을 쫓아다니면서 프로그램을 배우고, 피아노와 기타 소리를 컴퓨터로 찍어서 음악을 만들면 친구들이 그 음악을 게임에 넣었어요.

 

융: 고등학생 때부터 음악을 만들었군요.

 

슈보: 그때는 근데 배운 게 없었어요. 피아노를 칠 줄 알아서 그냥 해보면서 알게 된 거예요.

 

융: 악기도 여러 개 다루잖아요. 피아노는 언제부터 쳤어요?

 

슈보: 초등학생 때요. 중학교 때 교회에서 밴드 하면서 기타를 쳤고요. 엄마가 기타를 쳐서 엄마에게 통기타를 배웠어요. 아무튼, 고등학생 때는 게임 만들다가, 음악 만들다가 첫사랑이 향수를 좋아해서 향수를 모으기 시작한 거예요. 

 

융: 항상 이렇게 시작되곤 하죠, 여러 가지 취향은.(웃음)

 

슈보: 향수가 너무 좋은 거예요. 컴퓨터 게임이고 뭐고, 향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향사가 되기 위해 화학과를 목표로 잡고 수능을 준비했어요. 그때 정부에서 하는 ‘여성 청소년 게임 제작 대회’에 나갔는데 1등을 한 거예요. 그래서 장관상을 받고 대학에 입학했어요.

슈보의 고등학생 시절

 

융: 놀라운 얘기가 계속 나오네요. 

 

슈보: 그 당시에 전국에 게임을 만들 줄 아는 여자 고등학생이 저와 우리 반 친구들 3명뿐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장관상으로 입학했잖아요. 다른 친구들이랑 화학을 공부한 수준 차이가 나는 거예요. 화학 공부가 너무 어렵고 힘들었어요. 시험 볼 때마다 D 나오고. 그런데 1학년 때 철학 입문 수업이 A가 나온 거예요. 철학을 공부하는 게 재밌고 좋아서 복수전공을 했어요. 화학 D를 철학으로 A를 받아서 수렴시켜서 졸업했어요.

 

융: 화학, 철학을 전공한 게 지금 일에도 도움이 되나요?

 

슈보: 네. 제가 대학을 안 갔다면 지금 갖고 있는 관념들이 안 만들어졌을 것 같아요.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저에게는 또 다른 풀이었어요. 해외에서 공부하고 오거나 해외 대학원에 진학할 친구들도 있고. 화학 공부를 할 때는 좌절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철학은 제가 그 친구들보다 잘하는 거예요. '내가 이 친구들이랑 다를 바가 없구나.’ 배경이 달라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게 자존감을 높이는데도 도움이 됐고요.

  

화학은 디제잉할 때 도움되는 건 없지만 사는데 도움이 돼요. 예를 들면 제가 천문학, 물리학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보면, 화학을 공부했던 경험이 있으니 어려운 내용이 나와도 파고들면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좋아하는 걸 파고들고, 덕질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거예요. 철학은, 인생의 그릇을 넓히는 데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들어도 삶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에요.

 

융: 공감해요. 저는 대학교 필수 과목이라서 배웠는데, 처음에 철학이 재미없는 학문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는 거잖아요. 시대가 달라도 고민하고 생각하는 건 똑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더 앞서 나가기도 하고. 철학이 재밌는 학문이구나, 깨닫게 되면서 제가 오해했던 게 머쓱하더라고요.

 

슈보: 어떻게 화학과 철학을 같이 전공했냐는 질문을 받아요. 생각해보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모든 게 하나였잖아요. 물리학, 철학, 화학, 수학, 예술. 저는 화학, 철학을 같이 공부하면서 둘이 비슷한 학문이라고 느꼈어요.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형태화 시키고, 시뮬레이션을 하잖아요.

 

엄마가 어릴 때부터 신학 대학에서 배운 철학 수업을 얘기해주는데 그게 너무 재밌었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익숙하고 어렵지 않은 학문이었어요. 처음에는 익숙하고 쉬워서 관심을 갖게 된 거예요.

조향사의 꿈이 DJ로 흘러가기까지

융: 그런데 어쩌다가 조향사가 아니라 DJ를 하게 된 거예요? 항상 꿈이 확실하게 있는 편이었어요?

 

슈보: 원래 진짜 꿈이 컸어요. 프로방스에 있는 록시땅 본사에서 일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록시땅 홍보대사도 하고, 불어도 배우고. 꿈이 확실했다기보다는, 어떤 걸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냥 해봤어요. 뭔가를 계속하면서 사는 걸 좋아했어요.

 

융: 주변에서 반대한 적은 없었어요?

 

슈보: 가족이 반대한 건 DJ가 처음이었어요.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 간다고 했을 때도, 화학과 간다고 했을 때도, 엄마가 “해봐"라고 했거든요. 고등학교도 진짜로 들어가고, 화학과도 진짜로 들어가고. DJ만 유일하게 반대했어요. 화학이 너무 힘들어서 휴학을 했어요. 그때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서 기타를 쳤거든요. 근데 주객이 전도가 된 거예요.(웃음) 기타에 너무 심취해서 또 전공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클래식 기타를 파고들었어요. 학원에서도 저보고 재능이 있다고 하고요. 독주도 하고, 하루에 기타를 5시간씩 쳤어요.


하루에 기타를 5시간씩 치던 때가 있었다

 

융: 뭐 하나에 빠지면 제대로 빠지는 스타일이군요.

 

슈보: 당시 22살쯤 만나던 친구가 기타를 쳤거든요. 근데 헤어진 뒤로는 또 치기가 싫더라고요. 5시간씩 치던 걸 1시간도 안 치게 되고. 학교로 복귀한 날 운명처럼 학교 입구에서 DJ 동아리 모집 포스터를 발견했어요. 학교로 복귀하면서 새롭게 정착할 뭔가 필요해서, DJ 동아리에 들어가서 친구들이랑 매주 클럽에 다니고, 디제잉을 배웠어요. 친구에게서 배운 뒤로는 대학로의 한 공간에서 견습 DJ로 아르바이트하면서 음악을 꾸준히 틀었고요. 이런저런 파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더 큰 클럽에서 틀 수 있는 기회들이 열리고, 그 후로 계속 디제잉을 하게 된 거예요.

 

융: 그럼 조향사의 꿈은 어떻게 됐어요?

 

슈보: 하하. 조용히 사라졌죠. 바람처럼. 그 꿈을 버렸다는 생각도 안 들었어요. 조향사의 꿈을 버리고 디제잉을 택했다. 이게 아니라 앞을 보고 가다가 어라? 하고 제 눈길을 끄는 곳으로 계속 걸어간 느낌이에요. 

 

융: 나에게 오는 길을 막지 않아서 재밌는 일들이 생긴 것 같아요. 해외로도 많이 나갔잖아요. 제일 처음에 나가게 된 곳은 어디예요?

 

슈보: 2010년부터 디제잉을 했는데요, 태국에서 투어를 3~4번 정도 하고 태국에서 2년 동안 살았어요. 태국에 투어를 가면 현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저에게 태국에 오면 방 하나를 마련해준다는 제안을 받은 거예요. 태국은 밥도 더 싸고. 큰 고민하지 않고 가겠다고 결정하고 바로 나갔어요.


태국에서 디제잉하고 지내던 시절의 슈보

 

융: 인생의 길을 바꿀만한 큰 결정도 쉽게 내리는 것처럼 느껴져요. 걱정된 적은 없어요?

 

슈보: 저는 항상 잃을 게 없었어요. 한국에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달 방세 20만 원 내면서 바퀴벌레와 개미가 함께 나오는 집에서도 살고 그랬으니까요. 저는 제가 가난하다고 인식도 못했거든요. 돈이 없었던 게 뭐랄까, 저에게는 원동력이었어요.


해외로 나가며 새롭게 열린 세계

융: 한국에 오기 전까지 멕시코에 있었잖아요. 그 이야기도 궁금해요.

 

슈보: 태국에서 산지 2년 정도 됐을 때 대인기피증이 생겼어요. 디제잉도, 사는 것도 즐겁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른 일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하고 싶은 직업도 없고. 반년 정도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사람들도 안 만나고요. 그러다가 영어 모임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대인 기피증이 나아졌어요. 다시 0에서 시작하는 기분으로 어떤 일을 해볼까 고민하고, 찾아봤어요. 공고를 찾아보면 직업은 안 보이고 해외 도시만 보이는 거예요. 뉴욕에서 일하는 공고. 파리에서 일하는 공고. 무엇이든 좋으니 다시 나가고 싶더라고요.

 

융: 대학 때까지는 계속 한국에 있었어요?

 

슈보: 네, 여행도 많이 안 다닌 편이에요. 그런데 태국에서 살아보고 돌아오니 하루하루 새로운 삶이 그립더라고요. 해외 취업을 목표로 다양한 곳에 지원을 했어요. 그러다가 칸쿤 스튜디오에서 스냅사진 작가로 지원했는데, 제가 포토샵을 잘 다룰 줄 아니까 사진 경력이 없어도 저를 뽑아줬어요. 칸쿤에 신혼여행 온 사람들을 사진 찍어주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1년 있다가 칸쿤으로 옮겼어요.


 

융: 이게 언제쯤 이야기예요? 그런 결정을 내릴 때 기준이 있어요?

 

슈보: 3년 전 이야기예요. 딱 하나였던 것 같아요.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 저를 설레게 만드는 일이면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잘 안 들려요. 누가 뭐라고 하면, 상대도 기분 안 좋고, 나도 기분 안 좋고. 서로 감정만 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차피 저는 제 할 일을 할 거거든요. 

 

가볍게 생각하고 던지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 자기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고려해서 단단한 결정을 내리면, 저는 그냥 그 결정에 닿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줘요. 남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이잖아요. 자기 인생인데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결정했겠어요.

 

융: 공감해요. 행동하기 위해서는 내가 내 편을 들어주는 것도 꼭 필요한 것 같고요. 슈보가 할 줄 아는 언어가 뭐뭐였죠?

 

슈보: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는 공부 중이에요.

 

융: 우리 여행 갔을 때도 혼자 계속 언어 공부했잖아요. 저는 그것도 신기했거든요.

 

슈보: 언어가 너무 재밌어요. 가장 빠르게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것 같아요. ‘연애’가 다른 세계를 가장 빠르게 만나는 거라면, ‘언어’는 연애보다 더 큰 세계가 열리는 가장 쉬운 방법이더라고요. 저는 언어를 할 때마다 캐릭터가 달라져요. 스페인어 할 때의 나. 영어 할 때의 나. 한국어 할 때의 나. 언어마다 색깔과 표현 방식이 다르잖아요. 그런 것들에 제가 녹아들어서 새로운 퍼스널리티가 생기는 게 재밌어요. 제가 처음 영어를 배우면서 열린 세계가 커서 또 하고 싶더라고요. 스페인어도 열리고 나니까 언어 배우는 거에 중독되다시피 돼서 계속 파고들게 돼요.

 

융: 너무 좋아요. 칸쿤에서 스냅샷 작가로 활동하다가 어떻게 멕시코에서 3년을 살게 된 거예요? 그때만 해도 DJ를 계속할 생각이 아니었던 거죠?

 

슈보: 네. 오히려 사진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멕시코 시티에서 DJ 친구가 칸쿤에 놀러 왔는데 제 인스타그램을 보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혹시 DJ냐고 물어보면서 자기가 멕시코 시티에서 파티 만들면 와서 틀어볼래?라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한다고 했죠.

 

융: 오랜만에 튼 거였겠네요.

 

슈보: 네. 그래도 디깅은 계속하고 있었어요. 제가 평소에 듣던 음악, 좋아하는 음악들을 안고 떨리는 마음으로 갔는데요.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제가 음악을 튼 날, 난리가 났어요. “얘 도대체 뭐냐"는 소리를 들었어요. 왜 멕시코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제 와서는 이해가 가요. 제가 트는 음악이 멕시코 취향이었던 거예요. 그때는 몰랐어요. 이게 뭐지? 하고 어리둥절했죠. 그 DJ 친구의 친구들도 다 음악 업계 프로모터거나 DJ들이었거든요. 그때 한 번 틀고, 멕시코 친구들이 언제 다시 오냐고 묻는 거예요. 칸쿤에 다시 돌아갔다가 멕시코에서 공연하고. 그러다가 또 제안을 받은 거예요. 멕시코 시티가 DJ 씬이 좋으니까 와서 계속 디제잉해달라고요.


 

융: 우연히 흘러간 거잖아요. 너무 재밌다. 슈가맨도 생각나요.

 

슈보: 그게 뭐죠?

 

융: <서칭 포 슈가맨> 안 봤어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레전드 국민 가수인데, 아무도 이 사람의 출처를 몰라요. 소문만 무성하고. 알고 보니까 미국에서 혼자 음악을 하는 무명 가수였는데, 이 사람의 LP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가면서 이 음악이 터진 거예요. 정작 자기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음악가인 줄도 모르는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이미 슈퍼스타인 거죠. 공연하는데 전부 다 떼창 하고. 이 사람도 자기 음악이 지구 반대편에서 통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동네에서는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슈보: 너무 재밌는데요. 제가 ‘코스믹 디스코’라고 태국에서 음악을 틀 때, 이게 뭐냐고, 이상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이상하고 마이너하구나 생각했는데 멕시코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융: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슈보: 그냥 좋았어요. 사람들이 좋아해 준다는 개념밖에 없었어요.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된 그 친구가 저에게 방 하나를 내줄 테니 와서 살아도 된다고, 정착하는 걸 도와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유럽 여행 한 달 다녀와서 멕시코 시티로 옮겨서 3년을 산 거예요. 그 친구가 저에게 해준 것들을 항상 마음속에 담고 살아요. 그래서 한국에 온 멕시코 친구들이 보이면 신경 쓰고 베풀려고 노력해요.

 

융: 받아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사람을 믿었을 때 생기는 마법 같은 일이 있죠. 저도 세계 여행할 때 많이 느꼈어요. 저에게 바라는 것 아무것도 없이 그냥 베푸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어떻게 그게 가능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많다는 걸 여행하면서 알게 됐어요. 그래도 이쯤에서 그런 질문 많이 받았을 것 같거든요. 잘 모르는 낯선 사람인데 안 무서웠냐고요.

 

슈보: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친구랑은 이미 가족 같아요. 이름이 우리엘인데요. 우리엘은 제가 점점 크는 걸 보면서 진심으로 기뻐해요. 저는 우리엘 포함해서 멕시코 친구들 몇 명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게 있거든요. 우리엘의 집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미 몇 번 만났었고, 우리엘의 친구들도 만나보고. 함께 좋은 시간들을 보냈는데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어요.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이렇게 살아진 것도 맞고. 이렇게 살아서 이런 사람이 된 것도 맞아요.

 

융: 사람의 에너지는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짧게 만나도 한 번 더 보고 싶다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고요. 

바닥을 치고 높이 튀어 오르다

융: 스페인어는 가서 배운 거예요?

 

슈보: 칸쿤에서부터 독학했어요. 핌슬러, 로제타 스톤 프로그램들을 거의 10GB 받아서 공부했어요.

 

융: 뭐든 확실하게 파고드네요.

 

슈보: 덕후 정신이죠. 

 

융: 전 그게 공부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이 공부를 재미없게 생각하는데, 사실 디깅이 공부예요.

 

슈보: 맞아요. 내가 공부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팬심으로 파고들었어요. 최애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덕질하듯이 스페인어를 공부했어요. 멕시코에는 영어 못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더 빨리 배웠어요. 심지어 우리엘이 영어를 못해요. 일어나서 대화를 해야 하는데 하루 배운걸 바로 써먹을 수 있었어요.


슈보와 슈보의 멕시코 친구들


 

융: 우리엘은 슈보가 스페인어가 늘수록 그것도 뿌듯했겠어요. 마얀 워리어랑은 어떻게 인연이 닿았어요?

 

슈보: 그랬죠. 하하. 점점 대화에 심도가 깊어지니까요. 우리엘 집이 멕시코 시티 음악 씬 친구들이 모이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어요. 멕시코 시티의 디제잉 씬은 아직 세계적으로는 안 알려져 있지만, 멕시코에 있는 DJ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놀면서 중요한 인맥들이 생긴 거예요.

 

미호(Mijo)라는 DJ 친구가 있는데요, 멕시코 시티에 엠엔로이(M.N Roy)라는 유명한 클럽이 있어요. 미호의 소개로 그 클럽에서 틀게 됐는데 처음 튼 날 4~5시간을 틀었는데 또 대박이 난 거예요. 그래서 한 두 달에 한 번 레지던트 DJ로 활동하게 되고, 제가 잘 튼다는 소문을 듣고 엠엔로이 사장님이 절 보러 왔어요. 처음 만난 날 사장님이 저를 안아주면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음악 너무 잘 들었다고. 그 사장님이 마얀 워리어의 음악 디렉터예요. 사장님의 추천으로 버닝맨 마얀 워리어에서 틀게 된 거예요.(웃음)


 

융: 우와… 그런데 정말 ‘마얀 워리어'에 딱이에요. 저는 슈보의 마얀 워리어 셋을 진짜 많이 듣거든요. 특히 달리기 할 때. 제가 우주를 좋아해서 그런지 은하수를 옆에 끼고 달리는 느낌이 나요.

 

슈보: 저도 제가 ‘마얀 워리어' 스타일인지 몰랐어요.(웃음) 물 흐르듯이 흘러왔어요.

 

융: 이야기를 전부 듣고 보니 정말 흐르는 대로 살았네요. ‘뭘 해야겠다!’ 이것도 있었지만, 눈 앞에 재밌는 길이 보이면 놓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까지 온 길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슈보: 멕시코 파티 때가 극적이었어요. 칸쿤에 가게 된 경로가 대인 기피증 때문이잖아요. 인생에 바닥을 친 시기거든요. 그런데 바닥을 치자마자 바로 이렇게 올라온 거예요. 여길 오기 위해서 바닥을 찍었구나 생각했어요.

 

융: 바닥을 찍으면 올라가나 봐요. 저도 작년 이맘때 힘들고 무기력했는데, 다시 올라올 때쯤 슈보를 만난 거거든요. 이렇게 몰랐던 이야기를 듣고, 제가 영감을 받을 때마다 내가 나에게 이 일을 만들어주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하는 내내 너무 즐거웠어요. 마지막으로 사이더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슈보: 갑자기 생각난 건데요. 디제잉 10년 하면서 최근 3년 빼고 앞선 7년 동안 했던 고민이 있어요. ‘왜 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그런데 또 딱히 좋아하는 게 없지?’ 주변 DJ들 보면 ‘외길 테크노' 이런 말처럼, 하나의 장르를 파고드는 사람들이 멋있는 거예요. ‘왜 나는 없을까' 고민하면서 그냥 살았어요. 제가 끌리는 대로 조금씩 조금씩 하다 보니까 이 시간이 쌓여서 지금은 누가 봐도 색깔이 짙은 사람이 됐잖아요. 지금 저는 무슨 음악을 틀어도 사람들이 “이거는 슈보 색깔"이라고 말하거든요. 

 

하나의 장르와 카테고리에 겹쳐져서 색깔을 내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는데, 저 같은 사람은 뒤늦게 색깔이 발현된 거예요. ‘이런 색깔을 만들어야지' 생각하고 무리한 게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좋아서 조금씩 해보니까 저만의 독립적인 색깔이 생겼어요.


사이더들은 좋아하는 게 많잖아요. 그래서 사소한 것들이라도 제한을 두지 말고 열심히, 마음껏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왜 내 색깔이 없지' 이러고 아무것도 안 하지 말고, 열심히 살면서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카테고리화 된 색이 아니라 ‘나만의 색'을 창출해내는 때가 올 거예요.


Shubostar - Galaxy Express

Drawing for SIDERS


인터뷰를 하면서 슈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다양한 세계에 푹 빠져보고 탐험해본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컴퓨터 게임, 피아노, 기타, 사진, 언어, 디제잉. 세상이 나에게 보여주는 길을 거부하지 않고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 슈보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길은 이 질문에 관한 하나의 좋은 레퍼런스가 된다. 

 

나는 가끔 폭풍전야처럼, 슈보가 더 높이 튀어오르기 직전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 들어와 잠시 쉼표를 찍는 고요한 시기를 함께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작년에 만난 사이지만 이미 나의 일상에 깊숙히 들어와 각자의 길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친구. 지구별을 무대로 앞으로 더 훨훨 날아오를 아티스트. 앞으로 또 얼마나 새롭고 재밌는 세계를 열고 탐험하게 될까. 나는 슈보의 행보를 보면 진심으로 신이 나며 좋은 자극을 받을 것 같다. 슈보가 다시 해외 활동을 시작하고 지금처럼 자주 보지는 못하게 되더라도, 각자의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동질감으로 마음만은 늘 함께할 거란 걸 알기에. 그의 존재만으로도 내 마음은 한층 더 단단하고 든든해진다.


슈보 유튜브


슈보 인스타그램




해보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요!


SIDE에선 의심 대신 응원을,
현실적인 이유로 반대하기 전에
함께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다양한 색깔을 지닌 여러분의 스펙트럼이 펼쳐지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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