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할아버지의 작업실. 그의 공간 ‘도하서림'에서 떠오른 문장이었다. 시간을 머금은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일까.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이곳에서 내가 느낀 것은 깊이였다. 절대 한 번에 완성되지는 않았을, 애정하는 것을 오랫동안 사랑으로 지켜온 마음. 창문 옆에 자리 잡은 천체 망원경과 그 옆으로 보이는 우주 관련 책들. 표지와 제목이 보이지 않게 놓은 민음사 문학 전집. 노란색으로 빛나는 지구본.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책부터 바닥에 무심한 듯 놓인 해리포터 팝업 책과 토이스토리 인형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실에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그의 취향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가 잡문집이라 부르는 첫 책 <그날은 또 아주 처음이었다>은 내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려 글을 쓰고 싶게 만들었다. 그가 진행하는 ‘첫 유화 워크숍'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기술보다도 더 소중한 것을 배우고 왔다. 우산을 만들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식당을 운영하고, 가구를 만들고…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 넓은 스펙트럼 위에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모든 일은 하나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처음과 시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도하서림의 문을 두드렸다가 김진우라는 한 사람의 우주를 만나고 왔다.
융: 첫 유화 원데이 클래스에서 거의 한 시간 동안 그림책들 보여주셨잖아요. 클래스에서 제가 ‘그림 그리는 마음’을 얻어왔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조금씩 더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진우: 그 마음은 원래 갖고 계셨을 거예요. 누군가 거기를 비춰주니까 그때부터 인지가 된 거예요. 제가 가르친 건 없고, 여기 보라고 동전 하나 던져드린 것뿐이에요. 계속 그림을 그리고 계신 것 같아 기뻤어요.
융: 진우 님에게 그 마음을 비춰준 건 뭐였어요?
진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요? 독서, 건축물, 엄마 아빠와의 대화, 우리 집의 향. 그 모든 곳에 저의 마음이 있었는데 인식하지 못했던 걸 어느 순간 인지하게 됐어요
융: 진우 님과는 ‘시작’이라는 주제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가지 일을 시작할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해요.
진우: 시작할 때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더 열심히 계획했어요. 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즐거울 것 같은데 안 할 이유가 없으면 했어요. 그때는 계산하지 않고 그냥 했어요.
융: 글을 쓰고,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워크숍을 진행하고, 밤에는 이동해서 맥주집을 운영하면… 대체 언제 주무시나요.
진우: 새벽 4시 반? 그래도 여섯 시간은 자요.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야 했어요. 상황은 다 다를지 몰라도 하루가 24시간인 건 똑같잖아요. 생각해보면 애매하게 증발되는 시간이 꽤 많거든요. 그래서 잠을 좀 효율적으로 줄이고, 이동시간도 잠을 자거나 독서를 하는 등 활용하는 편이에요. 초반에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보니 일정이 중구난방이었는데, 이정표는 꼭 있어야 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부모님과 밥 먹기.
융: 이거 정말 공감해요.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우선순위로 먼저 내 일정에 넣어놔야 오히려 더 자유롭더라고요.
진우: 제가 집에서 작업실까지 오는 게 거의 3시간이 걸려요. 그럼 왔다 갔다 하는데만 6시간이잖아요. 초반에는 불평불만했어요. ‘진우야, 6시간이면 4일이면 다른 사람의 하루야. 너는 하루씩 밀리고 있는 거야. 40일이면 열흘 뒤로 처지는 거야.’
열심히 살기로 하고, 취미가 아니라 사업으로 수익화시키고 채산성을 개선시키려면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기서 잠도 자려고 노력해봤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더라고요. 소중한 걸음에 그런 마음가짐으로 손님께 인사드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융: 주변에 집을 구하는 건요?
진우: 세 달간 열심히 알아봤는데 재정적인 부분도, 안전의 부분도 전반적으로 맞는 곳을 찾지는 못했어요. 충분히 알아본 후에는 결심했어요. 불평하지 말자. 불평하면 이게 딱 내 그릇이다. 혜윤 님도 우선순위에 넣는 그 시간들이 소중하지 않아요?
융: 제가 독립하고 제일 좋은 것 중 하나가 뭐냐면요.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옆에 있어주고 싶을 때 회사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세상에 없는데 왜 이 시간을 허락받아야 할까.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내가 옆에 있어줄 수 있는 게 엄청 감사한 일이더라고요.
진우: 맞아요. 저도 아버지가 몸이 불편하실 때, 병원에 모시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무언가를 지킬 수 있다는 게… 아버지가 병원에 혼자 가는 모습을 모르면 아예 모르겠는데, 알고 나면 견딜 수가 없어요. 19살 때부터 어머니, 아버지가 번갈아가면서 몸이 편치 않았어요. 그러면 나의 좌표를 다르게 맞추는 거예요. 난 할 일이 많은데 부모님이 아프다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우리 엄마 아빠가 아프고, '지금부터' 이건 나의 일상이다. 나의 일 속에 일상을 끼워 넣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 일이 들어오는 거예요.
융: 너무 좋은 말이에요. 최근에 제가 메모한 문장과 같은 맥락이에요. 내 일에 삶을 맞추는 게 아니라, 삶에 일을 맞추고 싶다.
진우: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어요. 살다 보면 부모님이 아프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생기잖아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전심전력을 다 해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일하고 싶어요.
융: 부끄럽지 않고 싶다는 마음. 진우 님 책에도 자주 나오는 말이죠. 진우 님의 작업은 글, 그림, 공간을 아울러서 스펙트럼이 넓지만 같은 세계관인 게 느껴져요. 진우 님이 영향받은 아티스트들도 느껴지고요.
진우: 사실 아티스트라는 표현이요. 누군가 제게 예술이 뭐냐고 묻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싶어요.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고요. 우리 엄마, 아빠도 예술이고. 혜윤 님도 예술이고. 예술이란, 사람이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태도 자체라고 봐요. 이건 대체할 수 없어요.
융: 첫 유화 워크숍 때 설명해 주셨던 거랑도 연결되네요.
진우: 한결같죠.
융: 저는 ‘모두가 아티스트인 시대’로 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던지거든요. 제가 말하는 예술가는 어려운 게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가는 일이라고 말하고요. 예술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깨지는 느낌이에요.
진우: 내가 하고 싶은 것. 소중히 여기는 걸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 예술 같아요. 저는 오늘보다 내일 1mm라도 더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자유는 공부랑 연결돼요. 성적을 위해 해야 하는 공부가 아니라 궁금한 곳을 가보는 공부요.
융: 저도 덕질이 공부라고 생각해요. 아까 인터뷰 전에 진우 님이 한 말 너무 좋았어요.
진우: 사심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거요?
융: 네. 제가 하는 많은 일도 어떤 주제나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게 많아요.
진우: 저는 봉사도 자신을 위해 하는 거라고 봐요. ‘내가 이 일을 하면, 저 사람 기쁘잖아. 난 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거야.’ 이런 생각이 사실을 떠나 꽤나 오만 해지는 생각이거든요. 내 존재가 빠지면 저 사람은 제기능을 못 하게 된다는 의미가 깔려있어요. 봉사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어떤 것'을 지키기 위해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사심에서부터 일이 시작된다고 표현한 거예요.
융: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가 용기가 되고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이 마음이랑 ‘내가 너 도와줄게.' 이게 한 끗 차이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잖아요. 예전에 ‘배려가 배려가 아닐 수 있다'는 문장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내가 배려라고 한 행동이 누군가에겐 배려가 아닐 수 있구나.
진우: 예전에 식당 식구들 고생한다고 아이스커피를 사온적이 있어요. 그런데 직원들은 너무 바빠서 한입도 먹지를 못한 거예요. 그것을 들고 온 정성과 마음은 너무나도 고맙고 소중하지만, 아이스커피의 얼음은 다 녹아버리고 마시기에도, 치우기에도 애매하여 서로 간 마음만 쓰린 상황이 되었죠. 각자의 기준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걸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고민하는 그 마음가짐부터가 진짜 도움이겠구나. 몇 차례 그런 일들을 지나 저는 나의 기준으로 도움을 주는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준에서 보탬이 되어야 한다 강하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융: 시도 계속 쓰고 있어요?
진우: 글은 계속 적고있으나 지금은 가구에 조금더 집중하고 있어요. 곧 있으면 시험이 있어요.
융: 가구 만드는 일도 잘 어울려요.
진우: 아버지가 움직임이 큰 편인데, 간편하게 앉을만한 스툴이 없어요.
융: 그래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신 거예요?
진우: 그건 아니에요. 가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계속하고 있었어요. 제 세계관에서 필수인 일이고, 나무를 좋아하거든요. 가구를 공부하니까, 아버지가 편히 앉으실 수 있는 스툴을 만들 수 있는 선택지가 생긴 거예요. 글은 계속 블로그에 쓰고 있어요. 최선을 다해 솔직하게.
며칠 전에 저희 식구가 책 또 언제 내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때 마음이 소용돌이쳤어요. 누군가 내 글을 필요로 할 수 있구나. 다음 책은 또 다를 거예요. 가구 만든 다음에 그림책을 먼저 만들 예정이에요.
융: 그림책이요? 진우 님은 계획이 다 있었군요? (웃음)
진우: 계획이라기보단, 안 하면 안 될 것들의 주제가 있어요. 이때 이걸 꼭 해야지. 이게 아니라, 그 시점이면 그 일을 안 하면 안 되지 않나?
융: 그런 일을 어떻게 다 알고 있어요? 그냥 떠오르는 거예요?
진우: 생각을 그만큼 많이 했어요. “그냥 하세요"라는 말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마음가짐이 되기 위해서 그전에 생각을 정말 많이 했을 거예요.
융: 너무 공감해요. 저는 ‘사이드'도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했냐고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걸 처음에 고민한 게 2017년이에요. 어떻게 생각하면 3년 동안 고민하고 시작한 거라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빠르다고 하더라고요.
진우: 더 이상 고민할 시점이 아니라 이제는 해야 된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때는 추진력밖에 없어요.
융: 생각해보니까 사이드 처음 시작할 때도 그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진짜 안 하면 안 된다.
진우: ‘지금 해야지’가 아니라, 이제 안 하면 안 되지 않나? 아마 다들 유예기간을 줬을 거예요. 저의 서점도, 그림 집도. 아마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융: 저… 지금 그렇게 조금씩 품고 있는 생각 중에 하나가 ‘언젠가 소설이 쓰고 싶다'. 이 마음이 있거든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요.
진우: 그럼 언젠가 하실 거예요. 이게 죄책감이 들어요. 진우야, 너 이거 언제 생각했어. 지금 안 하면 부끄러운 거 아니야?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거죠.
융: 와, 맞아요. 혜윤아 너 이거 처음 생각한 게 언젠데. 아직도 안 했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했거든요. 하고 싶은데 괜찮나? 이 고민을 오래 했어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은 품은 지가 오래됐는데, 진우 님 워크숍에서 명분을 찾은 것 같아요.
진우: 첫 유화 워크숍까지 다녀왔어. 그런데 이제는 정말 안 하면 안 되지 않나?
융: 강력한 질문 같아요. 진우 님이 유화 워크숍을 연다는 포스팅이 제 인스타그램에 떴을 때. 힌트 같았어요. 우주가 나보고 여기로 가라는 거구나.(웃음) 저도 우주를 좋아하지만, 진우 님도 우주 엄청 좋아하시잖아요.
진우: 시야의 끝이 없는 곳을 바라보는 게 좋아요. 저라는 존재를 되게 작지만, 그래서 더 소중히 여기게 만들어줘요.
융: 저도 딱 그 마음을 갖게 해 줘서 좋아해요.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글을 사랑하는 이유기도 해요.
진우: 제 작업실에 떨어진 나뭇잎 조각이랑 작은 흔적들 있잖아요. 저는 치우지 않고 대체로 남겨두어요. 떨어진 조각들이 어여쁘잖아요. 작은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봐요. 작아야지 그만큼의 빈 공간이 생기고, 거기에 다른 친구들도 충분히 껴서 놀 수 있어요.
융: 진우 님의 책을 통해 진우 님을 알게 된 지는 몇 년 됐지만, 유화를 그리면서 점점 진우 님의 세계 안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게 보이는 거예요. 책 외에도 접점이 늘어나면서 진우 님의 세계가 확장된다고 느꼈어요.
진우: 사실 어릴 적부터 20대 초반 때까지는 “다 친구 하자!” 이런 성격이었어요. 힙합 좋아하고, 유튜브에 ‘소울 컴퍼니는 내 학창 시절의 전부였다'라는 댓글 보고 울고.(웃음) 무대 다 뛰어나가고, 열심히 놀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만 하는 게 어쩌면 누군가에게 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느순간 깨달았어요. 수줍은 친구에게 같이 놀자고 손잡고 끌고 나오면, 제가 맥주를 마시러 가는 가벼움과 그 친구에게 필요한 용기의 무게가 다를 수 있는 거예요. “야, 맥주 마시러 나와, 뭐 어때!” 이런 말이 그 친구에게는 꽤나 큰 무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융: 저도 20대 때는 술 마시는 거 좋아하고, 너무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았어요. 그때의 저를 생각하면 그렇게 자랑스럽지는 않아요.
진우: 그 시절만의 소중함이 있었을 거예요. 저는 지난 날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치열하게 또 다시 살아낼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아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아주 만약에 대우주가 “김진우 너를 과거로 보내겠노라. 가서 너의 지난날을 다시 보내고오라’ 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조금은 덜 주저하고, 조금은 더 솔직해지고 싶어요.
융: 솔직하고 싶다는 건 무슨 의미예요?
진우: 누군가 뭐 이런 걸 좋아하냐고 했을 때 눈치를 많이 봤어요. 20대 때는 내가 좋아하는 걸 견지하려는 뚝심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도 있어요. 20대라는 나이로 나누는 것이 아닌, 지나가야만하는, 감내해야만하는 어떤 마음의 부침들의 순간이 있어요. 그 시절에 제가 토이스토리를 좋아한다고 하면 누군가가 애기냐 라고 한적이 었어요. 내가 너무 유별난 건가 의심하게 되는 거예요. 아직 마음에 강력함이 없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 눈치 봤어요.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 솔직해져야 하는 건데. 맞춰주는 게 지켜주는 거라고 여겼던 거예요. 사실 그 사람 옆에서 최선을 다해서 솔직해지는 게 지켜주는 건데. 나를 훼손시켜서 그 사람을 안심시키면서 그걸 지켜준다고 여겼어요.
융: 맞아요. 맞춰주는 게 위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점점 알게 됐어요. 저는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에 대한 생각도 예전보다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진우: 코로나 이전의 세상은 기관차처럼 열심히 달렸어요. 그런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가볍고 손쉽게 조각 나는 걸 본 거예요. 사람은 자유롭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렬한데, 그 욕구를 마주했던 시기 같아요. 예전만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면서 양질의 온라인 클래스도 정말 많아졌고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어르신들에게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요. 혜윤 님은 혜윤 님 필드에서 클래스를 열고 지탱해주셔야 하는 거고, 제 필드에서 저는 이런 부분을 밝히고 싶어요.
융: 꼭 필요한 일이에요. 말씀하신 대로 제가 더 잘할 수 있는 필드는 다르지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어서 좋아요. 한편으로 감사하고요.
진우: 기술적인 무언가를 넘어 ‘동심’으로 연결되는 거예요. 제가 운영하는 공간은 공인 인증서나 블루투스 연결을 몰라도 그저 가족 모두가 어떤 애틋함으로 연결되고 기뻐했으면 좋겠어요.
융: 동심이라는 키워드가 좋아요.
진우: 마음속 잠시 잃어버렸던 동심을 다시 찾았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봐요.
융: 저도 제가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은 동심을 간직한 사람들이에요.
진우: 제가 제 인생으로 대변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게 뭘까 생각해보니까 저는 마음이더라고요. 누군가의 마음을 지키고 싶어요. 서점이라는 형태로 동심을 지키고 싶어요. 그래서 ‘놀이공원'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융: 그림 그리는 건 어떤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는 거예요?
진우: 그건 목적이 없어요. 그냥 하고 있어요. 모든 일에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 목적성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거든요.
융: 어제 읽은 책이 갑자기 생각나요. 김지수 작가님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는데, 거기에서 이어령 선생님이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라고 말해요. 인생을 춤으로 보면 목적이 자기 안에 있어서 자족할 수 있다고요.
진우: 아까 한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충분히 고민하고 하기로 했잖아요. 그때는 거의 무목적성으로 움직이지 않아요?
융: 맞아요. 그냥 시작하고 움직이게 되죠. 춤추는 것처럼.
진우: 머리로 생각했던 게 어느 순간 마음의 씨앗이 내려와서 안 하면 안 되는 그때는 거의 무목적이에요. 하고 싶은 일, 그냥 정말 보리차 끓이듯이 하면 된다고 봐요.
융: 보리차 끓이듯이요?
진우: 네, 말 그대로요. 대단한 일이라 여기지 않고 보릿물 끓이 듯이 해보는 거예요. 우리 어릴 때는 작은 냄비에 물 끓이는 것도 엄청난 일이었잖아요. 책도 처음이 어렵지, 한 번 내고 나면 생각한 것만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은 아니잖아요.
융: 동감해요. 그래서 독립출판물 만들어보라고 주변에 많이 추천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거 있지 않아요? 책은 내가 가족들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통로인 거. 우리 엄마나 가족들이 읽고, 책이 아니었다면 하지 못했을 대화를 하게 됐거든요. 그게 참 좋았어요.
진우: 굳이 말로 하기는 어려웠지만, 이런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이걸 보여줄 수 있죠. 저희 가족도 제 책 보고 많이 우셨어요. 제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해야 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한 번 이야기를 해두면 저도 더는 미련없어 이제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죠.
융: 후련함이 있죠. 김환기 선생님은 글도 진짜 잘 쓰시잖아요. 저도 너무 좋아하는데, 진우 님의 공간과 작업에서 김환기 작가님을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진우: 김환기 선생님이 남겨놓은 글이 없었다면, 제가 선생님의 그림에 이렇게까지 다가갈 수 있었을까싶어요. 워크숍 할 때도 김환기 선생님 작품은 많이 보여드리는데요. 꼭 직접 예매해서 가보라고 말씀드려요. 예매하는 수고부터 두발로 미술관으로 가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관람이라고요. 소중히 여기는 건 편리하게 받아들이지 말자고 해요.
융: 이상하게 아날로그의 불편함은 마음가짐을 좀 다르게 만들어요.
진우: 그게 정성이에요. 내가 시간을 들이는 만큼의 마음과 정성.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잖아요. 혜윤 님 우주 좋아하시니까, 4차원의 축 아시지요??
융: 시간의 축이 들어오죠.
진우: 맞아요. 우리는 시간을 볼 수는 없어요. 그런데 시간을 감각할 수 있어요. 김환기 선생님의 그림만 보면 3차원 세상에서 2차원 그림을 보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글과 그림을 같이 보면서 내가 그의 그림을 보러 가기 위한 시간까지 관람에 투영된다면… 우리는 4차원의 세계관을 접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4차원의 세계를 볼 수는 없지만, 감각할 수 있어요.
융: 저 이렇게는 생각을 못해봤는데... 김환기 선생님의 작품은 그 점 하나하나가 다 마음이고 정성이잖아요.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 그림을 그리는데 바친 시간과, 이 그림이 내 눈앞에 오기까지의 시간. 내가 김환기를 알게 되고 찾아가기까지의 시간. 그 모든 시간을 떠올려보게 하네요. 작품을 보면서 시간까지 볼 수 있다면, 분명 같은 걸 봐도 향유하는 깊이가 달라질 거예요.
진우 님의 공간과 작업에도 시간까지 입혀지면 어떤 모습이 될지가 궁금합니다.
진우: 이제 제가 해야 할 건 최선을 다해서 망하면 안 되는 거죠.(웃음) 저는 부모님께서 같이 나이 드시는 것이 아니라면, 조금은 빨리 나이 들고 싶어요.
융: 그것도 흔치 않은 마음인데요.
진우: 우주가 설정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건, 내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순간부터 정확히 동시에 그것과 이별을 시작하게 해 버린 거예요. 사랑, 이별, 슬픔. 인간은 이 세 가지를 다 따로따로 떼서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사실은 하나예요.
융: 와… 제가 아까 시 안 쓰냐고 물어본 이유가 이런 문장 때문인데요.
진우: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는 이별을 안 하거든요. 사랑한다는 건, 이별을 해서 오는 슬픔까지도 감내할 만큼의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융: 그러네요. 슬프다.
진우: 기쁨만 보고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누군가 혹은 무언가 내 앞에서 소실되었을 때 그 슬픔을 감내할 수 있는가. 그래도 사람들은 “나 저 사람 사랑 안 할래요.”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겠다고 할 거예요. 우리는 지금 이별하고 있어요. 모든 이별은 갑자기가 아니라 지금 이순간 하고 있는 거예요. 시간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한겹 한겹 무한히 쌓인다 생각해요. 그렇게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겹 한겹의 시간들도 천천히 쌓인다 믿고 있어요.
융: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슬퍼요.
진우: 제 생각에 생애는 기초적으로 슬픔이에요. 그 슬픔을 견지하고 있어야 희로애락을 더 성실하게 만날 수 있어요. 저희 아버지가 병원에서 아프셨을 때 세상이 원망스러웠거든요. 아침에 눈 뜰 때도 너무 비참하고요. 하늘을 원망하다가 그다음에는 아버지를 원망할 이유를 찾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슬프게한 백가지보다 저를 위해 애쓰셨던 단 한순간의 모습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미워할 이유를 찾다가,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모습이 떠오른 거죠. 그래서 이정도 원망했으면 충분하다. 그만 할 거 하자고 되뇌었어요. 슬프면 하루이틀 진심으로 슬퍼하고 할일하고, 그래도 슬프면 슬퍼하면서 할일하자.
융: 아빠를 갑작스럽게 잃었을 때 제가 겪은 과정도 떠오르네요. 진우 님은 감정에 솔직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우: “저는 엄마, 아빠의 아들이지만 그 전에는 ‘김진우'고, 또 그렇게 이름이 붙기 이전의 제가 존재하고 있어요. “엄마, 아빠 말대로 살다가 누구 원망하라고요.” 이런 말을 해서 엄마를 울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럴수록 내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했어요.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려면 누군가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소중하다 여기는 걸 더 확고히 이야기하고, 전심전력을 다 해야 해요.
융: 척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길이더라고요. 걱정되니까 의견이 다를 때가 많은 건데, 행동으로 보여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진우: 지금 제가 하는 일도 부모님이 저를 신뢰하게 되는 과정이 있었어요. 저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당연히 걱정되시겠지만,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말아요.
융: 저도 첫 책이 나오고 나서 가족들이 저에 대한 신뢰가 배가 됐어요. 어느 시점부터는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하면 그냥 응원해줘요. “혜윤이가 알아서 하겠지.” 이런 반응이거든요. 뭐든 첫 시작이 어렵지, 첫 발을 떼고 나면 그다음은 가속력이 붙는 것 같아요. 오늘 대화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어요.
진우: 의도했던 방향과 다른가요?
융: 의도가 없었어요.
진우: 너무 좋네요. 그런데 저에게는 목적을 물어보신 건가요?(웃음)
융: 시작하는 마음과 이 사람의 현재, 그 자체를 담고 싶다. 이게 사이더들도 가장 좋아할 거란 그 정도의 생각은 있었죠.(웃음) 우리 일과 인생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이 나와서 참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건 많지만, 시작을 망설이는 사이더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진우: 제가 우산을 처음 만들 때 방에다 적어둔 게 있어요. 방 문을 열 때마다 포스트잇을 보이게 붙여놓고, 이렇게 적어놨어요. “하기나 해.”
좋아하는 게 많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건 결국 뭘 안 하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거대한 걸 하려고 하지 말고, 정말 말 그대로 눈앞에 따뜻한 보리차부터 끓여보세요. 그러면 커피도 내리게 되고 차도 내리게 될 거예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냥 하고 있어야 돼요. 내가 뭔가를 사랑한다면 주저할 수가 없어요. 좋아하는 건 많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러분들은 정말 충분히, 그리고 또 깊게 오랫동안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것의 결과를 가기 위해선 어떤 과정을 분명히 지나가야해요. 그럼 그냥 하기만 하면 되는데, 물을 채우는 것은 내가 해야해요. 완벽해지려고 하지 말고, 정말 말 그대로 물부터 끓이세요.
진우 님과의 대화를 정리하며 ‘인터뷰를 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봤다. 나는 어떤 마음을 지키고 싶어서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걸까? 그 시작을 떠올려보면 역시 ‘좋아하는 마음’을 빼놓을 수 없다. 인생을 스스로 디자인해가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동질감과 동경. 호기심. 그들의 길을 응원하며 나의 길도 스스로 응원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일이 곧 나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었고 나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진우 님은 나와의 인터뷰가 ‘다큐멘터리' 같았다고 표현했다. “혜윤 님만이 할 수 있는 인터뷰였습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인터뷰. 인터뷰어에게 이만큼 황홀하고 고마운 말이 또 있을까. 사이드를 처음 시작할 때는 전문 인터뷰어가 아니었던 내게 사이드에서만 24번의 인터뷰라는 결과가 생겼다. 오랫동안 고민한 뒤, 진우 님의 표현대로 ‘이제는 안 하면 안 되지 않나?’라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스스로의 동력을 가지고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나다운 인터뷰를 진행하는 요령과 인사이트가 생겼다. 물을 끓이는 것으로 시작해 나만의 레시피로 이것 저것 요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의 고민과, 여기에 오기까지의 시간을 떠오르게 한 진우 님과의 대화가 누군가에게는 가스불을 켜고 빛나는 열망을 끓이기 시작하는 작은 계기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한 사람이 하나의 예술이자 하나의 우주임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시작과 끝이 만나는 지점에서 사이드의 24번째 인터뷰를 마친다.
* 이번 인터뷰를 끝으로 사이드 인터뷰는 잠시 쉬어갑니다. Start. Inspire. Dream. Explore. 시작하고, 영감 받고, 꿈꾸고, 탐험하고. 이 네 가지 카테고리에 6명씩, 어느덧 4번을 돌렸네요. 제가 진행한 인터뷰에는 하나하나 저의 정성과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시간을 오래 들여 편집하고, 정리합니다. ‘사심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진우 님의 말이 그래서 더더욱 와닿았던 것 같아요. 사이드 인터뷰는 이다음 스텝을 고민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사이드의 행보와 사이드의 인터뷰를 애정으로 바라봐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해보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요!
SIDE에선 의심 대신 응원을,
현실적인 이유로 반대하기 전에
함께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다양한 색깔을 지닌 여러분의 스펙트럼이 펼쳐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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