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 기술적인 무언가를 넘어 ‘동심’으로 연결되는 거예요. 제가 운영하는 공간은 공인 인증서나 블루투스 연결을 몰라도 그저 가족 모두가 어떤 애틋함으로 연결되고 기뻐했으면 좋겠어요.
융: 동심이라는 키워드가 좋아요.
진우: 마음속 잠시 잃어버렸던 동심을 다시 찾았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봐요.
융: 저도 제가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은 동심을 간직한 사람들이에요.
진우: 제가 제 인생으로 대변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게 뭘까 생각해보니까 저는 마음이더라고요. 누군가의 마음을 지키고 싶어요. 서점이라는 형태로 동심을 지키고 싶어요. 그래서 ‘놀이공원'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융: 그림 그리는 건 어떤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는 거예요?
진우: 그건 목적이 없어요. 그냥 하고 있어요. 모든 일에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 목적성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거든요.
융: 어제 읽은 책이 갑자기 생각나요. 김지수 작가님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는데, 거기에서 이어령 선생님이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라고 말해요. 인생을 춤으로 보면 목적이 자기 안에 있어서 자족할 수 있다고요.
진우: 아까 한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충분히 고민하고 하기로 했잖아요. 그때는 거의 무목적성으로 움직이지 않아요?
융: 맞아요. 그냥 시작하고 움직이게 되죠. 춤추는 것처럼.
진우: 머리로 생각했던 게 어느 순간 마음의 씨앗이 내려와서 안 하면 안 되는 그때는 거의 무목적이에요. 하고 싶은 일, 그냥 정말 보리차 끓이듯이 하면 된다고 봐요.
융: 보리차 끓이듯이요?
진우: 네, 말 그대로요. 대단한 일이라 여기지 않고 보릿물 끓이 듯이 해보는 거예요. 우리 어릴 때는 작은 냄비에 물 끓이는 것도 엄청난 일이었잖아요. 책도 처음이 어렵지, 한 번 내고 나면 생각한 것만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은 아니잖아요.
융: 동감해요. 그래서 독립출판물 만들어보라고 주변에 많이 추천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거 있지 않아요? 책은 내가 가족들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통로인 거. 우리 엄마나 가족들이 읽고, 책이 아니었다면 하지 못했을 대화를 하게 됐거든요. 그게 참 좋았어요.
진우: 굳이 말로 하기는 어려웠지만, 이런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이걸 보여줄 수 있죠. 저희 가족도 제 책 보고 많이 우셨어요. 제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해야 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한 번 이야기를 해두면 저도 더는 미련없어 이제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죠.
융: 후련함이 있죠. 김환기 선생님은 글도 진짜 잘 쓰시잖아요. 저도 너무 좋아하는데, 진우 님의 공간과 작업에서 김환기 작가님을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진우: 김환기 선생님이 남겨놓은 글이 없었다면, 제가 선생님의 그림에 이렇게까지 다가갈 수 있었을까싶어요. 워크숍 할 때도 김환기 선생님 작품은 많이 보여드리는데요. 꼭 직접 예매해서 가보라고 말씀드려요. 예매하는 수고부터 두발로 미술관으로 가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관람이라고요. 소중히 여기는 건 편리하게 받아들이지 말자고 해요.
융: 이상하게 아날로그의 불편함은 마음가짐을 좀 다르게 만들어요.
진우: 그게 정성이에요. 내가 시간을 들이는 만큼의 마음과 정성.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잖아요. 혜윤 님 우주 좋아하시니까, 4차원의 축 아시지요??
융: 시간의 축이 들어오죠.
진우: 맞아요. 우리는 시간을 볼 수는 없어요. 그런데 시간을 감각할 수 있어요. 김환기 선생님의 그림만 보면 3차원 세상에서 2차원 그림을 보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글과 그림을 같이 보면서 내가 그의 그림을 보러 가기 위한 시간까지 관람에 투영된다면… 우리는 4차원의 세계관을 접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4차원의 세계를 볼 수는 없지만, 감각할 수 있어요.
융: 저 이렇게는 생각을 못해봤는데... 김환기 선생님의 작품은 그 점 하나하나가 다 마음이고 정성이잖아요.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 그림을 그리는데 바친 시간과, 이 그림이 내 눈앞에 오기까지의 시간. 내가 김환기를 알게 되고 찾아가기까지의 시간. 그 모든 시간을 떠올려보게 하네요. 작품을 보면서 시간까지 볼 수 있다면, 분명 같은 걸 봐도 향유하는 깊이가 달라질 거예요.
진우 님의 공간과 작업에도 시간까지 입혀지면 어떤 모습이 될지가 궁금합니다.
진우: 이제 제가 해야 할 건 최선을 다해서 망하면 안 되는 거죠.(웃음) 저는 부모님께서 같이 나이 드시는 것이 아니라면, 조금은 빨리 나이 들고 싶어요.
융: 그것도 흔치 않은 마음인데요.
진우: 우주가 설정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건, 내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순간부터 정확히 동시에 그것과 이별을 시작하게 해 버린 거예요. 사랑, 이별, 슬픔. 인간은 이 세 가지를 다 따로따로 떼서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사실은 하나예요.
융: 와… 제가 아까 시 안 쓰냐고 물어본 이유가 이런 문장 때문인데요.
진우: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는 이별을 안 하거든요. 사랑한다는 건, 이별을 해서 오는 슬픔까지도 감내할 만큼의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융: 그러네요. 슬프다.
진우: 기쁨만 보고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누군가 혹은 무언가 내 앞에서 소실되었을 때 그 슬픔을 감내할 수 있는가. 그래도 사람들은 “나 저 사람 사랑 안 할래요.”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겠다고 할 거예요. 우리는 지금 이별하고 있어요. 모든 이별은 갑자기가 아니라 지금 이순간 하고 있는 거예요. 시간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한겹 한겹 무한히 쌓인다 생각해요. 그렇게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겹 한겹의 시간들도 천천히 쌓인다 믿고 있어요.
융: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슬퍼요.
진우: 제 생각에 생애는 기초적으로 슬픔이에요. 그 슬픔을 견지하고 있어야 희로애락을 더 성실하게 만날 수 있어요. 저희 아버지가 병원에서 아프셨을 때 세상이 원망스러웠거든요. 아침에 눈 뜰 때도 너무 비참하고요. 하늘을 원망하다가 그다음에는 아버지를 원망할 이유를 찾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슬프게한 백가지보다 저를 위해 애쓰셨던 단 한순간의 모습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미워할 이유를 찾다가,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모습이 떠오른 거죠. 그래서 이정도 원망했으면 충분하다. 그만 할 거 하자고 되뇌었어요. 슬프면 하루이틀 진심으로 슬퍼하고 할일하고, 그래도 슬프면 슬퍼하면서 할일하자.
융: 아빠를 갑작스럽게 잃었을 때 제가 겪은 과정도 떠오르네요. 진우 님은 감정에 솔직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우: “저는 엄마, 아빠의 아들이지만 그 전에는 ‘김진우'고, 또 그렇게 이름이 붙기 이전의 제가 존재하고 있어요. “엄마, 아빠 말대로 살다가 누구 원망하라고요.” 이런 말을 해서 엄마를 울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럴수록 내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했어요.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려면 누군가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소중하다 여기는 걸 더 확고히 이야기하고, 전심전력을 다 해야 해요.
융: 척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길이더라고요. 걱정되니까 의견이 다를 때가 많은 건데, 행동으로 보여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진우: 지금 제가 하는 일도 부모님이 저를 신뢰하게 되는 과정이 있었어요. 저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당연히 걱정되시겠지만,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말아요.
융: 저도 첫 책이 나오고 나서 가족들이 저에 대한 신뢰가 배가 됐어요. 어느 시점부터는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하면 그냥 응원해줘요. “혜윤이가 알아서 하겠지.” 이런 반응이거든요. 뭐든 첫 시작이 어렵지, 첫 발을 떼고 나면 그다음은 가속력이 붙는 것 같아요. 오늘 대화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어요.
진우: 의도했던 방향과 다른가요?
융: 의도가 없었어요.
진우: 너무 좋네요. 그런데 저에게는 목적을 물어보신 건가요?(웃음)
융: 시작하는 마음과 이 사람의 현재, 그 자체를 담고 싶다. 이게 사이더들도 가장 좋아할 거란 그 정도의 생각은 있었죠.(웃음) 우리 일과 인생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이 나와서 참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건 많지만, 시작을 망설이는 사이더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진우: 제가 우산을 처음 만들 때 방에다 적어둔 게 있어요. 방 문을 열 때마다 포스트잇을 보이게 붙여놓고, 이렇게 적어놨어요. “하기나 해.”
좋아하는 게 많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건 결국 뭘 안 하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거대한 걸 하려고 하지 말고, 정말 말 그대로 눈앞에 따뜻한 보리차부터 끓여보세요. 그러면 커피도 내리게 되고 차도 내리게 될 거예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냥 하고 있어야 돼요. 내가 뭔가를 사랑한다면 주저할 수가 없어요. 좋아하는 건 많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러분들은 정말 충분히, 그리고 또 깊게 오랫동안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것의 결과를 가기 위해선 어떤 과정을 분명히 지나가야해요. 그럼 그냥 하기만 하면 되는데, 물을 채우는 것은 내가 해야해요. 완벽해지려고 하지 말고, 정말 말 그대로 물부터 끓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