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색채와 무심한 듯 부드럽게 그어진 선으로 이뤄진 헤르시의 그림은 언제나 따뜻한 환대로 온 마음을 휘감았다. 어떤 그림에서는 지중해 연안의 파도 소리가 들렸고, 어떤 그림 앞에서는 친구와 와인 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저마다 다른 장면이지만 비슷한 결의 마음과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사실 그가 쓰는 소설 속 세계관에서 출발하니까.
헤르시를 알면 알수록 기획자로서의 뿌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걸 완전히 체감한 순간은 우연히 본 해방촌 ‘실크로드’ 전시와 ‘에디션 서촌’ 프로젝트에서였다. 심술궂은 무더위에 허덕이던 2025년 여름, 해방촌 사무실 근처 카페에 갔더니 그의 드로잉이 걸려 있었다. 인근 식물 가게에 들어갔더니 이번엔 다른 그림과 파도 거울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우연인가? 검색해 보니 해방촌 일대에서 ‘실크로드’를 주제로 헤르시의 전시가 한창이었다. 그 기간 동안 해방촌은 그의 그림을 비단 삼아 쾌활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그해 가을 서촌에서 인상 깊게 본 ‘에디션 서촌’의 배경에도 기획자 헤르시가 있었다. 이쯤 되니 헤르시의 작품만큼이나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일하는 사람일까?
슬기: 대화를 진짜 좋아하시나 봐요. 촬영 내내 수다 떠느라 시간이 한참 지났어요.
헤르시: 평소에 워낙 수다 떨면서 재밌는 아이디어 나누길 좋아해요(웃음).
슬기: 주로 대화로부터 작업을 이어가는 편인가요?
특히 요즘엔 누군가와 식사를 했을 때 느낀 감정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있어요. 공간의 분위기나 온도, 대화의 밀도, 서빙하는 분들의 태도 같은 것들을 묘사하면서요. 그러다 보니 요즘엔 감각에 대한 주제가 더 끌리네요.
슬기: ‘He Realized Nothing Concrete’. 헤르시(HERNC)는 무슨 뜻인가요?
‘구체적인 걸 깨달아서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큰 뜻을 두기보다 그저 그 순간에 느낀 것,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해 나아가다 보면, 나중에 늙어서야 진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요? 완벽에 집착해도 나중에 보면 어차피 완벽하지 않더라고요.
슬기: 잠깐 이야기를 나눴지만, 자꾸 기획자로서 면모가 보여요. 원래는 어떤 일 했어요?
문화 예술 쪽에서 마케팅했어요. 마케팅, 기획. 그때 회사 되게 열심히 다녔어요. 일을 너무 좋아했거든요.
슬기: 역시! 회사를 다니면서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건가요?
엄밀히 말하면 그렇죠. 20대 후반쯤부턴가 갑자기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기획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을 텐데, 언젠가 내 일이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일을 떼고 수식어를 붙이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슬기: 영상 촬영 중에 ‘내가 ____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는 질문에 ‘여행’이라는 답을 하셨어요. 여행이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나요?
제가 <미드나잇 인 파리>같은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좋아하는데, 무작정 그곳에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감사하게도 당시 일하던 회사에서 한 달 휴가를 주셨죠.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그냥 프랑스로 갔어요.
슬기: 무언가를 찾겠다는 의지나 목표를 두고 간 게 아니군요?
파리 남쪽 마을 호스텔에 한 달간 묵으면서 그곳 사람들을 만났어요. 정확히는 관람한 거죠, 그들을. 당시 유럽에 대한 환상에 빠져 그랬을 수도 있지만 유러피언의 문화가 누구에게나 친절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들을 보면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실마리를 얻었어요. 친절하고 온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슬기: 작업물에서 보이는 지중해 풍도 지향하는 삶의 태도를 닮은 걸까요? 따뜻하고, 반짝이며, 자유로운.
(스마트폰 앨범 속 영상을 보여주며) 시작점은 이 장면이에요. 루브르 박물관 앞인데, 백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계셨어요.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없고, 두 분은 그저 무아지경인 거예요. 이 상태, 이 세계관! 지금도 이 영상을 자주 봐요. 다들 누가 뭘 먹고 어떻게 노는지 별 관심이 없어. 근데 뭘 시작한다고 하면 응원해 주고 환대하고. 그런 모습들에서 새로운 세계를 깨달았어요.
여행은 여운이 짙은 꿈처럼 끝났다. 다시 돌아온 일터, 그리고 서울. 그는 어쩐지 자신의 고향이 차갑게 느껴졌다. 빠른 속도와 치열함. 헤르시는 또 한 번 질문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이번엔 펜을 잡고 노트를 열었다. 3개월에 한 번꼴로 쓰이던 일기장이 매일 빼곡한 글로 채워져갔다.
슬기: 어마어마한 일기 덕후죠?
일기는 제 감정이나 생각을 배출할 수 있는, 나만의 도구잖아요. 처음에는 하루 일과를 썼어요. 그러다 어떤 때는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혹은 칭찬을 쓰기도 하고요. 자꾸 쓰다 보니까 일기 종류가 다양해지더라고요. 일과 기록, 다짐 일기, 반성 일기, 험담 일기,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일기, 1년 회고 일기….
슬기: 일기를 3인칭으로 쓰기도 한다면서요.
내 감정을 아카이브 해서 엮으면 소설로 확장돼요. 세계관을 3인칭화 하거나 시점을 바꿔서 만든 게 소설이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친구와 나눈 대화가 재밌었으면 장면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기록해요. 이름도 아예 바꿔서 ‘리카르도’라고 지칭하고요. 이렇게 일기를 쓰면서 세계관과 이야기를 확장해 나가요.
슬기: 아까 잠깐 요즘 쓰는 소설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요즘 구상 중인 세계관이 있나요?
제 브랜드 ‘솔라리움’은 컬렉션을 만드는 사물 상점이에요. 경험과 기억이 담긴 사물을 파는 곳이죠.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사 오면 그 시절의 기억을 사오는 것과 같은 맥락이에요. 그런 기억이 담긴 사물을 하나둘 모아 하나의 컬렉션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솔라리움을 운영하는 저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점 주인이죠. 그래서 요즘 가구 만들기가 재밌어요.
슬기: 기억에 남길 사물을 만든다는 포인트가 재밌어요.
전면에 내세우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제 브랜드 세계관을 더 디테일하게 얘기하자면 뭐가 많아요(웃음). ‘솔라리움을 만든 사람은 솔라리에다. 그가 나에게 이 상점을 물려주고 갔으며, 내 미션은 좋은 사물을 컬렉팅하고 만들어 사람들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다’.
슬기: 동화 같아요.
정확히는 이솝우화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아요. 저는 이솝우화처럼 언제나 긍정적인 메시지를 남기려 하거든요. ‘열심히 살아라’, ‘세상에는 행복한 일이 생각보다 더 많다’. 이런 이야기가 작품 곳곳에 녹아있어요.
인물, 공간, 사건. 헤르시는 이 세 가지 요소로 세계관을 만든다. 그가 그린 그림과 가구는 무대 장치로써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며 서사를 다방면으로 넓혀 가고 있었다.

기획이라는 예술적 장르
슬기: 그림은 어떻게 처음 시작했어요?
따로 배운 적은 없고요. 회사 다닐 적에 도자기를 취미로 하고 있었는데, 당시 제 작품이 부산 아난티 호텔에 잠깐 놓였어요. 그걸 보고 한 큐레이터 분이 연락이 왔어요. 만나보자고. 그때 제 딴에는 낙서 같은 스케치를 보여드렸는데, 저더러 계속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색감이 너무 재밌다며. 그러면서 제 스케치들을 15만 원인가 주고 사 가셨어요. 그렇게 슬슬 시작해 봤어요.
슬기: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이 생겼네요. 그런데 혼자 취미로 하는 것과 작가로서 누군가에게 작업물을 보이는 일은 또 다르잖아요. 그 벽을 허문 계기가 있어요?
음, 어떤 단계를 깬다는 건 애초에 없었어요. 뭔가 만들었으면 버리거나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슬기: 그동안의 작업도 효용성이 먼저였겠어요.
쓰임이 떠오르지 않으면 작업 시작이 안돼요. 맨 처음 잔이라는 기물을 만든 것도, 식탁 앞에 앉은 노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색감의 배치를 만든 거예요.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 만든 거지, 여느 장인들처럼 무아지경 상태는 아니에요. 한 작업물이 저에게 어떻게 배치되는지, 그것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가 중요해요.
Ⓒ HERNC 본인 제공
슬기: 정말 기획자네요. 그래서인지 협업을 잘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프로젝트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니까요.
협업 좋아해요. 결국 혼자 있으면 아무도 빛이 안 나요.
슬기: 특히 로컬 프로젝트를 재밌어 하시더군요. 해방촌 ‘실크로드’ 전시라든지, ‘에디션 서촌’ 모두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신 거죠?
동네에서 뭔가 하는 걸 좋아해요. ‘실크로드’라는 주제는 다양한 경험들이 연결돼 이야기가 엮여야 하는데, 어느 한 전시장에서는 그게 다 표현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탈리아스러운 이야기는 ‘세몰리나클럽’ 식당에서, 어떤 건 카페 ‘업스탠딩’에서, 그리고 식물 가게 ‘그린그라피제이’에서. 이런 식으로 풀어낸 거죠.
결국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각 공간에는 체취와 사람이 있으니까요. 돈이 진짜 많이 생기면 작은 마을을 꾸리고 싶어요.
슬기: 더불어 살기. 계속 등장하는 키워드네요.
친구, 가족. 저는 그런 게 좋아요.
슬기: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도 해볼 생각이 있나요?
기회가 되면 지역에 작은 아트 축제를 만들어서 각 매장에 다른 아티스트들 연결해 보고 싶어요. 근데 이 일 진짜 힘들어요.
슬기: 협업 아티스트나 브랜드, 공간 섭외도 다 직접 하실 테니…!
너무 힘들지만, 항상 좋은 에너지를 나눈다는 거. 서로 부대끼면서 얻는 에너지는 디지털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아요. 사실 제가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아요. 그래서 항상 감사하죠. 감사한 마음이 이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힘 아닐까요?
슬기: 패션, F&B, 공간….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이 로컬 프로젝트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닐까요?
브랜드 프로젝트는 제 작업을 실험해 보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옷에 그림이 올라가면 어떨지 전문가들과 해볼 수 있는 경험. 로컬 프로젝트와 브랜드 협업이 꼭 다르진 않지만, 전자는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사비도 들여서 하는 거예요.
대개 기획은 결과물이 겉에 잘 드러나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일이라고들 한다. 목적을 세우고, 사람과 공간을 연결해 흐름을 만드는 일. 그러나 헤르시의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기획이 곧 색과 선으로 배치되어 분위기를 형성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왜 만들어져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 기획은 감각을 세우고 예술적 사고에 들어가게 만든다. 덕분에 표현은 감응에 그치지 않고 한 세계의 포문을 열며 더 멀리 날아간다.
슬기: 대화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믿나요?
대화의 경험이 없으면 온화해질 수 없거든요. 올바른 사람이 되려면 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들을 엮고 재단해 나라는 책을 완성해 가면서 좋은 인격체가 탄생한다고. 그런 맥락에서 소설을 좋아해요.
슬기: 너무 공감해요. 작가님의 작업은 대화가 확장되는 과정의 일부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저는 대화하면서 이야기를 제 식으로 흡수를 하려고 해요. 어떨 땐 단점일 수도 있는데,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는 게 아니라 상상해 보는 거죠. 이 사람이 다른 경험을 했으면 이렇게 했겠구나 하면서. 한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계속 뻗어나가요. 보통 대화 중에 딱 한두 마디가 기억에 남는데, 거기서부터 작업을 시작해요.
슬기: 요즘 빠져 있는 게 있다면?
릴스(웃음). 요즘 숏폼 콘텐츠 만들기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답니다.
슬기: @papotepress 라는 계정도 새로 만들었더라고요.
그것도 대화 기록 계정이에요. 주변인들과의 대화를 먼저 담으려고요. 제가 인터뷰를 되게 좋아해요. 예전에 회사 다닐 때 ‘로피스 매거진’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었어요. 창작자들이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쳐왔는지 담아내는 매체였죠.
슬기: 성공으로 보이는 현 모습이 아니라 과정을 조명하는 거죠?
맞아요. 누군가 잘 됐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현재만 보잖아요. 제가 구글 스프레드시트 툴을 좋아하는데, 그걸로 ‘휴먼 스터디’를 해요. 내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20대, 30대에는 뭘 하면서 보냈나 디깅 하는 거예요. 요즘은 챗 GPT 덕분에 정보를 습득하는 데 30분도 안 걸려요. AI가 관련 링크 다 띄워주잖아요. 예전엔 3~4시간은 기본으로 걸렸어요.
슬기: <SIDE>의 첫 번째 주제도 그런 의도에서 나왔거든요.
어떤 사람의 처음이나 지나온 과정을 보면 환경 탓을 할 수가 없어요. 그들도 처음부터 잘한 게 아니잖아요. 박찬욱, 손흥민 이런 사람들도 우연히 기회를 잡은 거고, 우리가 모르는 고군분투가 몇 년씩은 있을 거예요. 사람 공부를 하다 보면 생각보다 ‘나도 해볼 만하다’는 걸 알게 돼요. 그리고 또 배운 게, 내 주변에 누가 있는지 살펴 보는 거. 멀리서 시작하지 않아도 돼요.
이야기를 통과한 헤르시의 작품은 또 다른 이야기로 쪼개져 타인의 삶에 가닿고, 따뜻한 감각과 기억을 선물한다. 그는 이야기의 이러한 증식, 확장성을 사랑한다. 그가 대화를 즐겨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꺼이 계속하는 동력 찾기
슬기: 이렇게 많은 아웃풋을 내면서 고갈되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해요? 내면에 무언가 공급돼야 결과물을 만들 수 있잖아요.
영감을 위해 특별히 노력하는 건 없어요. 저는 꼭 작가가 될 거라거나, 꼭 어떤 가구를 만들겠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거든요. 아까 보여드린 영상 속 할아버지처럼 살고 싶은데 그 방법이 뭘까 고민하는 편이에요. 그래도 작업적으로 뭘 만들까 고민한다면, 제가 나중에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건 지중해풍 레스토랑이거든요? 나중에 운영할 식당을 떠올리며 거기에 어울릴 만한 거울, 가구, 그림 작업을 하는 식이에요. 그곳에서 나눌 대화를 상상하며, 식탁 위 놓일 사물의 배치를 그려보는 거죠.
슬기: 그래도 딜레마는 없었어요? 내가 너무 동어 반복하고 있지 않나 하는. 성장이 멈춘 듯한 좌절이 든 적은요?
저는 동어 반복해야 한다고 봐요.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내 길을 가고 있는 거죠. 표현 방식이 바뀌는 거지, 내 가치관은 반복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한두 달 매진해 작업했는데 그 결과물이 너무 별로인 적도 있어요. 그땐 복싱을 하거나 산책을 하면서 신체적인 움직임으로 환경을 바꿔요. 몸을 움직이면 리프레시가 돼요.
슬기: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저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반복된 제 메시지에 한계를 느끼던 참이거든요.
요즘 세계적인 딜레마가 장인이 없는 것, 한 가지를 반복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부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꾸준히 하는 사람을 멋있다고들 말하는 것 같아요. 릴스 중에 내용은 별거 없는데 일본 장인들이 능숙하게 재료를 손질하거나 요리하는 게 막 조회수 터지잖아요. 화려한 디저트 가게나 음식점이 멋진 거 같아도 사람들이 진짜 줄 서는 곳은 일본 장인의 찻집이고요. 몇십 년간 한 가지 메시지를 말하는 사람에 대한 희소가치가 있다고 봐요. 젊은 사람들은 소비함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고요.
슬기: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요?
너무 많죠. 근데 뭘 더 할까보다 어떻게 더 걸러낼지 고민하고 있어요. 다양하게 하는 게 모두 재밌는 건 아니에요. 과정이 재밌는 걸 하고 싶어요. 요즘은 여러 결과물을 하나의 콜라주나 컬렉션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 보니까, 하고 싶은 게 있더라도 이게 나의 길에 어울리는지 걸러내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슬기: 촬영하며 흘리듯 말했던 ‘중심’에 대한 이야기도 같은 맥락일까요? 중심을 찾기 위해 ‘하기’보다 ‘안 하기’에 집중하는 시기 말예요.
저에게 20대는 다양한 경험으로 좋아하는 걸 찾는 시간이었어요. 30대는 명확한 방향 안에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 중이고요. 그러다 보니 방법을 고를 안목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은 되게 다양한데 평양으로 향하는 길을 타면 방향이 바뀌는 거잖아요. 맞는 고속도로인지 국도인지 판단하는 게 중요하죠. 물론 유턴을 해도 상관없어요. 선택에 책임을 질 수만 있다면 말이죠. 여러 가지 하는 거 좋은데, 중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게 중심은 작업이 아니라 메시지고요. 그게 제가 죽을 때 붙을 수식어겠죠?
슬기: 시간을 어떻게 쓰시는지도 궁금해요. 관심사가 많으면 24시간이 부족하진 않나요?
생각보다 시간 되게 여유롭게 써요. 일단 잠을 10~12시간 자고요. 최근 시작한 복싱을 두세 시간 하니까, 실제 일하고 작업하는 시간은 6시간 정도? 대신 실천이 좀 빨라요. ‘비주얼 콜렉트’ 인터뷰 릴스 처음 올릴 때 기획부터 촬영, 편집 업로드까지 5일 걸렸어요.
슬기: 의외네요! 오히려 건강한 생활 같고요.
잠은 좀 줄여야 하나 싶긴 해요(웃음). 세상과 단절된 시간이 너무 기니까. 그래도 덕분에 멘탈은 건강해요. 밤에 다음날 투두 리스트를 써 둬서 일 처리가 빠른가 봐요.
슬기: 시작을 앞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시작은 사실 시작이 아니다!
슬기: 시작은 시작이 아니다?
네, 원래 하려고 했던 거니까. 단지 회피를 멈춘 거죠. 미뤄 왔던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자신에게 중요한 단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을 정확히 맛본 사람은 언제든 선택할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헤르시와 대화를 나눌수록 끝내 하나의 방법보다 태도에 닿았다. ‘어떻게(How)가 아닌 ‘왜(Why)’. 그에게 창작은 자신이 그리고 꿈꾸는, 삶의 모습을 증명하고 지속시키는 선택이다. 자신의 삶을 설계하는 기획자로서, 그리고 타인의 곁을 연결하는 아티스트로서 그의 다음 챕터가 계속 궁금해졌다. 글이 그림이 되고, 그림에서 가구가 나오고, 가구가 공간으로 확장되며, 그 공간은 다시 대화와 기억으로 환원되는 순환 속에서 헤르시의 마침표는 어느 곳에 찍히게 될까?
파도를 닮은 테이블을 등지고 서서 모래에 앉은 햇살처럼 개구지게 웃는 헤르시 작가와 안녕을 나누며, 나는 기꺼이 시작하고 싶었다. 맑고 선명한 인격체가 되어가는 감각을 맛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발 내디딘 시작이 끝없는 시행착오로 이어질지라도.
해보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요!
SIDE에선 의심 대신 응원을,
현실적인 이유로 반대하기 전에
함께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다양한 색깔을 지닌 여러분의 스펙트럼이 펼쳐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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