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1. 명사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理想). (→소망1, 소원1)
2. 명사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허무한 기대나 생각. (=몽상1)
꿈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상은 역하다, 비싸다, 무섭다 같은 것들. 이어서는 멋지다, 이룰 것들, 이룬 것들이 떠오른다. 이상하다. 나는 꿈을 참 사랑하는데.
꿈이라는 귀여운 단어 아래에는 참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야망이나 욕망. 욕심. 호기심과 재미. 허영과 인정 욕구. 생산해내고 싶다는 욕구나 도망가고 싶은 마음. 복잡하고 추한 마음들은 대충 꿈으로 퉁쳐지기도 한다.
아빠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해서 어느 광고 회사에 들어갔다. 아빠가 몇 번이고 자기가 만든 자동차 광고 영상 비디오테이프를 틀던 게 생각난다. 엄마는 주로 삶을 책임졌다. 아빠는 꿈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대체로 영화나, 음악이나, 사업이나 돈이기도 했다.
꿈은 많은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보다 꿈을 꾸는 사람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꿈꾸는 아빠를 동경했고 응원했다. 언제부턴가 엄마의 책임이 당연해졌을 때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꿈은 다 허튼소리다. 꿈 때문에 저 사람이 현실을 열심히 살지 않는다. 그놈의 꿈이 이뤄지질 않아서. 이뤄지기가 어려워서. 꿈은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악독한 놈이다.
아빠의 영향인지 타고난 기질이 그런 건지 나는 이렇다 할 꿈은 없었다. 중학교 때는 그림이 그리고 싶었는데 애매한 재능으론 큰일 못한다기에 쉽게 포기했다. 복수 전공은 미디어 아트를 하고 싶었는데, 그때도 교수님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너는 기획을 해야지 아트를 하려고 하진 말라고. 그래서 또 깔끔하게 포기하고 취업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꿈은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허무한 기대나 생각>이어서 로또 당첨 같은 거였다. 안 되면 말고. 사실 그렇게 바랐던 적 없어.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었던 적은 없다. 꿈을 꾸는 것보다 나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하니까, 그런 끈적하고 간절한 꿈이면 안 되는 거였다. 간절하다가 꿈이 나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앞서게 되면 나는 그 꿈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으니까. 져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때가 올 테니까. 내가 꿈을 꾸면 누군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엄마가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도 전에 엄마가 너 꿈이 뭐냐 물었더니, 내가 <밖에는 나무가 잔뜩 보이고 하얀 가구가 있는 집에서 고양이 키우면서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단다. 그래서 엄마가 <그런 거 말고 직업을 골라야지> 했더니, <엄마는 행복하게 사는 걸 꿈으로 정할 생각은 없어?>라고 했단다. 맹랑한 꼬맹이였다. 근데 어느 순간 시니컬함이 이렇게 장착이 되었냐구.
그리고 꿈이 없던 나는 19년도 6월 제주도에서 이런 인스타그램을 남김:

한창 졸업 논문 쓰고 있었을 때였는데 내가 디지털 노마드 될 수 있을 줄 알았겠어? 그냥 로또 당첨되면 좋겠다 처럼 말한 건데 그게 이뤄져 있었다. 지금은 노트북 하나로 어디서든 돈을 번다. 그럼 사실 이건 허무한 기대가 아니라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었던 걸까? 여러 꿈 가닥 중에 이것만은 내가 하고 싶어서 이쪽으로 가는 선택을 끊임없이 했던 걸까?
19년도에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광고대행사에 줄줄이 지원했고 줄줄이 떨어졌다. 이번 달엔 내가 기획하고 촬영하고 출연(…)까지 한 광고들이 릴리즈되었다. 이것도 꿈이 이뤄진 걸까? 아빠가 틀던 비디오테이프가 생각났다.
나는 언젠가 내 미래를 <꿈꿔봐>라고 했을 때, 넓은 마당에서 도자기를 굽는 나를 떠올렸다. 물레도 못 차고 가마를 혼자서는 떼본 적도 없으면서 그냥 막연하게 그게 좋아 보였다.
지금은 안다.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도자기를 만드는 거보다 웹사이트 만드는 게 재밌고, 미디어 아트를 구현하는 거보다 화면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게 더 좋다. 선명해지면서 남의 꿈과 내 꿈이 비로소 구분이 된다. 구분이 되니 참 자유롭다. 자유. 하여튼 나는 꿈한테서 놓여났다는 것이다.
꿈은 심사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꿈을 떠올렸을 때 기분이 좋고 살고 싶은 마음이 들면 되는 거지.
지금의 내게 꿈을 묻는다면. 삶을 아주 아주 만족스럽게 살아내는 것. 내키면 어디든 떠날 수 있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것. 계절을 느끼고 사소한 것의 귀함을 아는 것. 실없는 소리에 웃고 떠드는 것. 세상이 날 필요로 하고 나는 그럼 선뜻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아픈 곳 없이 건강하고 만족스럽게 사는 것. 이게 내 꿈이다. 이것들을 지키려면 돈이 많이 들어서… 그 책임을 회피하느라 꿈을 피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책임지느라 열심히 산다.
18년도에 쓴 일기에 이런 게 있었다: <내가 꿈꾸던 삶이 내가 살았던 삶임을 알았을 때.. 허탈하고 허망하다.> 그러니 꿈을 잘 기록해두자. 이룬 줄도 모르게 이뤘을 때 축하해줄 수 있게. 꿈은 오늘 꿔도 다음 날 아침에 이뤄질 수도 있는 건데. 이렇게 가벼운 건데. 평생 꿈꿀 일 없을 거라는 중2병 모연이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꿈꿔도 된다. 꿈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거창하지도 않다.
꿈
1. 명사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理想). (→소망1, 소원1)
2. 명사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허무한 기대나 생각. (=몽상1)
꿈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상은 역하다, 비싸다, 무섭다 같은 것들. 이어서는 멋지다, 이룰 것들, 이룬 것들이 떠오른다. 이상하다. 나는 꿈을 참 사랑하는데.
꿈이라는 귀여운 단어 아래에는 참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야망이나 욕망. 욕심. 호기심과 재미. 허영과 인정 욕구. 생산해내고 싶다는 욕구나 도망가고 싶은 마음. 복잡하고 추한 마음들은 대충 꿈으로 퉁쳐지기도 한다.
아빠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해서 어느 광고 회사에 들어갔다. 아빠가 몇 번이고 자기가 만든 자동차 광고 영상 비디오테이프를 틀던 게 생각난다. 엄마는 주로 삶을 책임졌다. 아빠는 꿈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대체로 영화나, 음악이나, 사업이나 돈이기도 했다.
꿈은 많은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보다 꿈을 꾸는 사람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꿈꾸는 아빠를 동경했고 응원했다. 언제부턴가 엄마의 책임이 당연해졌을 때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꿈은 다 허튼소리다. 꿈 때문에 저 사람이 현실을 열심히 살지 않는다. 그놈의 꿈이 이뤄지질 않아서. 이뤄지기가 어려워서. 꿈은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악독한 놈이다.
아빠의 영향인지 타고난 기질이 그런 건지 나는 이렇다 할 꿈은 없었다. 중학교 때는 그림이 그리고 싶었는데 애매한 재능으론 큰일 못한다기에 쉽게 포기했다. 복수 전공은 미디어 아트를 하고 싶었는데, 그때도 교수님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너는 기획을 해야지 아트를 하려고 하진 말라고. 그래서 또 깔끔하게 포기하고 취업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꿈은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허무한 기대나 생각>이어서 로또 당첨 같은 거였다. 안 되면 말고. 사실 그렇게 바랐던 적 없어.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었던 적은 없다. 꿈을 꾸는 것보다 나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하니까, 그런 끈적하고 간절한 꿈이면 안 되는 거였다. 간절하다가 꿈이 나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앞서게 되면 나는 그 꿈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으니까. 져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때가 올 테니까. 내가 꿈을 꾸면 누군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엄마가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도 전에 엄마가 너 꿈이 뭐냐 물었더니, 내가 <밖에는 나무가 잔뜩 보이고 하얀 가구가 있는 집에서 고양이 키우면서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단다. 그래서 엄마가 <그런 거 말고 직업을 골라야지> 했더니, <엄마는 행복하게 사는 걸 꿈으로 정할 생각은 없어?>라고 했단다. 맹랑한 꼬맹이였다. 근데 어느 순간 시니컬함이 이렇게 장착이 되었냐구.
그리고 꿈이 없던 나는 19년도 6월 제주도에서 이런 인스타그램을 남김:
한창 졸업 논문 쓰고 있었을 때였는데 내가 디지털 노마드 될 수 있을 줄 알았겠어? 그냥 로또 당첨되면 좋겠다 처럼 말한 건데 그게 이뤄져 있었다. 지금은 노트북 하나로 어디서든 돈을 번다. 그럼 사실 이건 허무한 기대가 아니라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었던 걸까? 여러 꿈 가닥 중에 이것만은 내가 하고 싶어서 이쪽으로 가는 선택을 끊임없이 했던 걸까?
19년도에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광고대행사에 줄줄이 지원했고 줄줄이 떨어졌다. 이번 달엔 내가 기획하고 촬영하고 출연(…)까지 한 광고들이 릴리즈되었다. 이것도 꿈이 이뤄진 걸까? 아빠가 틀던 비디오테이프가 생각났다.
나는 언젠가 내 미래를 <꿈꿔봐>라고 했을 때, 넓은 마당에서 도자기를 굽는 나를 떠올렸다. 물레도 못 차고 가마를 혼자서는 떼본 적도 없으면서 그냥 막연하게 그게 좋아 보였다.
지금은 안다.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도자기를 만드는 거보다 웹사이트 만드는 게 재밌고, 미디어 아트를 구현하는 거보다 화면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게 더 좋다. 선명해지면서 남의 꿈과 내 꿈이 비로소 구분이 된다. 구분이 되니 참 자유롭다. 자유. 하여튼 나는 꿈한테서 놓여났다는 것이다.
꿈은 심사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꿈을 떠올렸을 때 기분이 좋고 살고 싶은 마음이 들면 되는 거지.
지금의 내게 꿈을 묻는다면. 삶을 아주 아주 만족스럽게 살아내는 것. 내키면 어디든 떠날 수 있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것. 계절을 느끼고 사소한 것의 귀함을 아는 것. 실없는 소리에 웃고 떠드는 것. 세상이 날 필요로 하고 나는 그럼 선뜻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아픈 곳 없이 건강하고 만족스럽게 사는 것. 이게 내 꿈이다. 이것들을 지키려면 돈이 많이 들어서… 그 책임을 회피하느라 꿈을 피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책임지느라 열심히 산다.
18년도에 쓴 일기에 이런 게 있었다: <내가 꿈꾸던 삶이 내가 살았던 삶임을 알았을 때.. 허탈하고 허망하다.> 그러니 꿈을 잘 기록해두자. 이룬 줄도 모르게 이뤘을 때 축하해줄 수 있게. 꿈은 오늘 꿔도 다음 날 아침에 이뤄질 수도 있는 건데. 이렇게 가벼운 건데. 평생 꿈꿀 일 없을 거라는 중2병 모연이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꿈꿔도 된다. 꿈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거창하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