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여유’라는 이름의 행복을 찾아서 written by 예시

조회수 400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날이었다. 세 번째 수업에 접어든 그림책 테라피 수업을 듣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운 날씨에 가벼운 산책을 했다. 온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던 벚꽃잎들이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라며 이별의 춤을 추고 있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이제 막 피어난 라일락 꽃향기가 코끝을 찔렀고, 신호등을 두 번 더 건너니 아파트 단지 속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잠시 쉬어갈 겸 공원 벤치에 앉았다. 이제 겨우 벚꽃이 떨어졌을 뿐인데 봄이라기엔 꽤나 더워졌네, 긴 남방을 훌훌 벗어 허리춤에 묶으며 생각했다. 며칠 전, 좀처럼 따뜻해질 기미가 없는 얼음장같은 방바닥을 맨발로 밟았다가 “이건 봄이 아니야!”라며 놀랐었는데 갑자기 후덥지근해진 날씨가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마른 목을 잠시 축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맞은편 나뭇가지 위로 시선이 향했다. 단풍나무였다. 곧장 단풍나무 아래로 다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단풍나무 아래에 서서 하늘을 보면 낮에도 별이 보여요”

봄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는 단풍잎들을 보며 그림책 수업에서 들은 들꽃향기님의 말을 떠올렸다. 그날 수업에서는 영화 <퍼펙트 데이즈>와 그림책 <할머니의 저녁식사>를 보고 읽었다. 특별할 것 없이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이지만 매일 내 삶을 채워주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함께 빙 둘러앉아 나누던 참이었다. 밤하늘의 별을 좋아하는데 집에서는 도저히 별을 볼 수 없어 슬프다는 써니 님의 이야기에 그럼 낮에 단풍나무 아래에 서 보라며, 그럼 별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들꽃향기님은 특유의 환한 미소를 보였었다.


그가 일러준 대로 단풍나무 아래서 올려다 본 파아란 하늘엔 뾰족뾰족 눈부신 별이 보였다. 기분 좋은 봄바람에 신난 나뭇잎들은 넘실대며 일렁였고 잎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올 때마다 별은 더 환하게 빛났다. 아무런 소음 없는 고요함, 따뜻하고 포근한 햇살, 푸르른 잎사귀의 지저귐, 걱정 없는 평온한 마음. 시간은 마치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내가 사랑하는 가장 완벽한 순간이었다. 행복하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e45a84c15476d.png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삶’. 이는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어온 내 삶의 이상향이다. 여유,라는 두 글자만 봐도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게 맛있는 걸 먹은 기분이 들면서 배가 부르고 기분이 좋아진다. 다정히 품어주며 넉넉히 내어주는 마음이 느껴지고, 티 없이 맑은 환한 미소가 생각난다.


여유로운 삶을 동경하게 된 건 십 년 전 혼자 떠났던 치앙마이 여행 때문이었다. 광고 회사를 다니며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던 중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때 태국 북부에 자리한 제2의 도시인 치앙마이를 알게 됐다. 치앙마이로 떠나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푸릇한 자연에 둘러싸인 ‘그곳’에 머물러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Bankangwat (반캉왓)'이라는 예술인 마을에서 한국인 사과씨와 태국인 남편이 함께 운영하는 숙소인 ‘그곳’. 태국의 전 국왕이 꾸준히 설파해왔던 ‘피앙퍼 정신’을 삶으로 살아내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ENOUGH FOR LIFE(이너프 포 라이프)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했다. 자족하는 삶. 무리하지 않고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삶. 그것이 바로 ‘피앙퍼 정신’이 뜻하는 바이다. 그는 귀여운 세 명의 아들에게도 같은 뜻을 가진 단어들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피앙퍼, 퍼피앙, 퍼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에게 맞는 삶의 속도로 살고자 하는 사과씨의 단단한 마음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60e31e21caf0c.jpg

한낮에도 포근한 이불에 돌돌 말려있고 싶은 이너프 포 라이프.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벌레 소리에 몸이 한없이 늘어지는 곳이에요.


0f2f19b6d1ef6.jpg

똑똑, 오전 9시면 배달되는 조식. 오후쯤이 되면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예술인 마을 ‘반캉왓’. 매일 이 문을 열고 나가 조식을 먹고, 여행자들의 화창한 얼굴을 내려다 보았지요.


d3ebdbe4dc389.jpg

사과씨 남편분이 직접 지은 이너프 포 라이프 2호점. 티크 나무로 만들어진 문과 창문들을 좋아합니다.


e4d1a76f56f97.jpg

나무를 깎아서 만든 옷걸이와 핸드메이드 셔츠. 이너프 포 라이프는 숙소 뿐만 아니라, 예쁜 소품들을 살 수 있는 소품샵도 운영하고 있어요.


그런 사과씨의 마음이 숙소에서 머무르는 동안 전해졌기 때문일까. 비행기 티켓을 끊으며 바랐던 것처럼, 여행하는 동안 나는 매 순간이 만족스러웠다. 나무집만 보고 떠나온 여행이었기에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렇기에 욕심낼 것도 없었다. 빽빽하게 짜여 움직여야 할 일정도, 꼭 가고 싶은 장소 같은 것도 없었다.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움직이고 싶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길을 걷다 가고 싶은 카페를 발견하면 들어가 몇 시간이고 생각을 끄적이거나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여행지에서조차도 시간이 바삐 흘러갔던 지난 여행과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다.


하루는 선데이 마켓을 놀러 갔는데 예상치 못한 소나기를 만났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했던 터라, 한편에 마련된 휴게 공간으로 몸을 잠시 피했다. 평소의 나였다면 여행을 왔는데 비가 오면 어떻게 하냐며 짜증부터 났을 텐데 시원하게 퍼붓는 빗줄기에 마냥 웃음만 나왔다. 비마저도 즐거웠다. 그때 내 시야에 마켓에서 물건을 판매하던 상인들이 보였다. 나야 여행객이니 비 따위 웃음으로 넘길 수 있겠지만, 오늘의 몫을 해내야 하는 상인들은 이야기가  다르지 않을까. 다들 오늘 장사는 접고 철수하겠지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물건이 젖지 않게 임시방편으로 가려둔 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옆 동료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도 태연하고, 여유롭게. 속상한 기색 하나 없이 비가 오면 오는 거지라는 태도로 함박웃음을 짓고서. 그 장면은 내 기억 속 한편에 선명하게 자리 잡았고, 그들처럼 나도 여유로운 삶의 태도를 가지고 일상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ec74e2e40f8b2.jpg

세월의 흔적과 애정어린 손길이 닿아있는 것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눌러요.


a96b19a6ba3ae.jpg

여행이 아닌 일상 속에선 종종 하늘을 올려다 봐요. 햇살이 화창한 날일수록 더욱 자주요. 빛을 머금은 반짝이는 잎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땐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어요.


6484839f72595.jpg

기분 좋은 햇살에 몸을 맡겨봐요.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에 절로 미소를 띄워봐요. 마음껏 지금 이 순간을 누려봐요.


그렇지만 일상으로 돌아오자 나는 금세 다시 미소를 잃었다. 책임감이 강한 인간으로 태어난 탓일까. 매 순간 성실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가훈을 수십 년간 들으며 커온 탓일까.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에 욕심이 앞섰다. 저 사람만큼 잘 하고 싶다. 시선은 늘 위를 향했고, 멋진 성과를 내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다 보면 늘 내 것엔 자신이 없어졌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좀처럼 만족스럽지 않았다. 내 영혼의 친구 J는 이런 나를 위한 구호까지 만들어줄 지경이었다. “예시 이즈 이너프!” 아무리 구호를 외쳐도 소용없었다. 한 분야에서 일해온 햇수가 길어지는 만큼 인정받고 싶은 욕심과 좋은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은  커져갔다.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조금이라도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가만히 있을 틈이 없었다. 쉴 틈 없이 앞만 보며 달렸다. 삶의 이정표가 성취와 성장을 향해있던 시절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내게 여유 따윈, 사치에 불과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마음의 넘어짐을 반복했다. 난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 거지? 내가 원했던 건 뭐였을까? 자주 길을 잃었고, 종종 일상에 멀미를 느꼈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다 결국 모든 것을 멈춰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시기에 우연인지 운명인지 진짜로 계단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며 발목을 다쳤다. 멈춰야겠다고 다짐을 했음에도 무언갈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매일 같이 목에 턱턱 걸리던 시기였다. 마음의 브레이크 밟아도 밟아도 제대로 멈추지 못하는 걸 눈치챘는지, 아예 발을 다치며 물리적인 브레이크에 걸려버렸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한 달이 넘도록 칩거 생활을 해야 했고, 한 달이 지나고도 두 발을 땅에 딛고 걷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기 위해서는 천천히 걸어야 했는데 이게 웬걸, 평소라면 5분이면 도착했을 거리가 30분이나 걸렸다. 내 뒤에 걸어오던 사람들은 쉬이 나를 앞질러갔다. 그렇게 멀어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한 명, 두 명 쌓여갈 때마다 나는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아야 했다. 타야 하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해도 뛸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지. 괜찮아. 천천히 다음 버스를 타면 돼. 괜찮아. 천천히 걷자. 그렇게 내 마음을 달랬다. 그때 알았다. 무언가를 빨리 이루려는 조급한 마음과 끊임없이 생겨나는 욕심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꽉 쥐고 살려니 그동안 나는 괴로웠다는 것을. 그래서 그토록 꿈꿨던, 여유를 즐기는 삶을 살 수 없었다는 것을.


b87f6f51489c6.jpg

매일이 바쁜 오늘이지만, 우리에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이 필요해요.


847d1c8d638f8.jpg

거북이처럼 천천히, 느린 바람이 되어봐요. 느리게 걸어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을 놓치지 말아요.


천천히 걸어보지 않으면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알 수 없다. 느리게 걷는다는 건 삶의 구석구석을 충분히 둘러보며 걷고 싶다는 말이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도 작고 사소한 행복을 발견하며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는 뜻이다. 이루는 날보다 누리는 날을 살겠다는 나와의 약속이다. 빨리 도착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지난한 시간을 기꺼이 즐기며 감내하겠다는 다짐이다. 언제든 쉬어가도 괜찮다는 나를 위한 위로이자 사랑의 마음이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 몸에 익숙해져 있던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또다시 내 안에서 새로운 욕심이 꿈틀댈 수도, 앞만 보고 달리려는 경주마 모드가 작동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이 다시 내게 온대도, 언제든 내가 가진 것이 얼마만큼인지를 아는 ‘지혜’와 넘치려는 마음을 적당히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내 눈앞을 질주하며 달려간대도 괘념치 않고 잔잔히 걷는 사람이고 싶다. 이젠 삶의 이정표가 향하는 방향을 바꾸려 한다. 성취와 성장 대신 여유와 기쁨의 방향으로. 치앙마이 선데이 마켓에서 만난 그 상인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생각하면서. 내 마음 창고에 불안과 걱정, 해야 할 일들을 꽉꽉 채워 넣는 대신 여백의 공간을 만들어두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그렇게 충분한 마음으로, 기꺼이 즐겁게 일을 해야지. 이제서야 진심을 담아 J에게도, 나에게도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nough for life!

예시 is enough!


81dfdc0d26f92.jpg

기꺼이 충분한 마음을 안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요, 우리.

4 0

사이드 대표자.정혜윤 | 0507-1478-1023 | sideinseoul@gmail.com | 서울 용산구 소월로20길 56-4 | BUSINESS NO. 644-13-01361 [ 2021-서울광진-1854 CHECKING ]

© SID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