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프리랜서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written by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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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고, 2년 전까지 딩크로 살아도 좋겠다 생각했던 나였다. 일이 매년 더 바빠지기도 했어서 현실적으로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한 책임도 무거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임신, 출산, 그 이후에 다가올 육아의 모든 과정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가장 큰 요인은 ‘프리랜서’라는 나의 직업상 구조였다.


프리랜서라는 직업군을 선택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돈 벌기를 쉬어본 적이 없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던 나이부터 돈을 벌며 학업을 병행했고, 취업 준비 기간에도 단기 알바라도 하며 경제활동을 이어갔다. 회사를 다닐 때도, 부업을 하고 있었고, 그 부업이 나의 본업이 되어 프리랜서로 전환점을 맞은 순간부터는 더더욱 쉴 수 없었다. 나에게는 유급 휴가도, 루팡할 월급도 없었기 때문에 매일매일 나의 일급을 번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다.


20대를 쉼없이 달린 덕분에 30대의 시작을 또래들보다는 평안하게 할 수 있었겠지만, 계속해서 스스로를 더 몰아붙일뿐 ‘안정감’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이런 와중에 결혼을 하고 남편과 가족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임신은 그렇다치고(그때는 몰랐지 임신이 이렇게 힘들줄), 출산하면 최소 3주의 공백은 생길 거고, 빨리 시터 선생님을 구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일하긴 어려울텐데 나 괜찮을까? 내가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 클라이언트들이 일감을 덜 주거나, 너무 내 눈치를 보면 어떡하지?’


AI가 세상에 들어오고 천지가 개벽을 하고 있음에도 병원에 가면 임신,출산에 ‘안전한 나이’와 같은 것들은 변하지 않은 탓에 30대 초반 결혼을 한 순간부터 이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몇 %의 돈이라도 받을 수 있는 출산 휴가도 육아 휴직도 없는 ‘프리랜서’이며 ‘엄마’로 나는 살 수 있을까?


수많은 불안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론적으로 먼 미래를 바라봤을 때 조금 더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했다. 노력은 해보자. 1년 안에 아이가 찾아와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키우고, 아니면 길 잃은 고양이들을 돌보며 지금과 같이 둘이 재밌게 살자.


그 과정에서 스스로 믿어보려 애썼던 것 중에 하나는 나 자신이었다. 도태되는 것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나, 매일 공부하고 성장하려 노력해온 나. 그러니 세상 처음 겪어 보는 일들에 잠시 내가 멈추더라도, 아니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다시 동력을 찾아갈 스스로를 믿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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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도 배우기 시작했다 근데 배가 너무 나오면 못 치겠지..?


아이가 찾아온다는 것

비장한 결심도 잠시, 아이를 갖기 위한 과정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자 간절해지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오래 아이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는데 오만하다 싶으면서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그랬다.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다보니 약간은 자포자기였던 2025년 12월 말이었다. 콘서트를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몸 상태가 평소와는 달랐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집어드는데, 희미한 두 줄이 보였다.


임신 주수를 계산하는 방법도 몰랐던지라 여러모로 산부인과를 늦게 가게 되었는데, 산부인과를 방문한 첫날, 나는 7주차 임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집이라는 난황과 7mm의 작디 작은 아이의 존재를 확인했고, 신체 변화가 많이 없어 임산부라는 자각조차 없었던 내게 초음파를 통해 들은 아이의 심장 소리는 수많은 감정을 들게 했다. 바쁘게 사느라 병원도 늦게 왔는데, 일한다고 바쁘게만 지냈는데, 그래도 너는 내 안에서 이렇게 크고 있었구나. 임신 확인서와 필요한 검사에 대한 안내들을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내게 처음으로 ‘엄마’라는 아이덴티티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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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인 같던 아가 약 9주차쯤!


마인드도 그랬지만, 몸의 변화도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입덧은 거의 없었지만, 소위 말하는 ‘양치덧’이 생겨 칫솔질을 할 때마다 눈물이 쏙 빠지게 구역질을 했다. 낮잠도 없는 편이었는데, 매일 오후 2시쯤이면 잠이 쏟아졌다. 게다가 초기 진료를 받던 과정에서 단백뇨(소변에 정상적인 양보다 많은 단백질이 섞여 나오는 현상, 신장 필터 기능 손상을 나타내는 초기 핵심 신호) 과 혈뇨(소변에 비정상적인 양의 적혈구가 섞여 나오는 증상)가 다량 발견돼서 고위험산모로 대학병원으로 바로 옮겨졌다. 대학병원 진료를 받은 첫 날에는 현재 상태가 지속될시 나에게 어떤 위험이 생길 수 있는지, 아이가 미숙아로 태어날 수 있음에 대한 가능성과 NICU(신생아 중환자실)안내를 받았다. 신장내과 연계로 치료도 시작했는데 약물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이기에 무염 식단으로만 관리를 해야했다. 신장에 과부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칼륨과 인, 고혈압을 유발할 수 있는 당도 조심해야 했다. 이 모든 게 임신 후 2개월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병원에서는 “아이는 엄마 몸에 있는 영양분을 빼먹고 커서 잘 클겁니다. 엄마가 힘들 거예요” 라고 말씀하셨다. 식단을 시작하고 초기 임신 대비 약 3.5kg가 빠졌고, 매주 아이는 커도 내 몸무게는 늘지 않았다. 단백질도 조심해야 하다보니, 근육도 많이 빠졌다. 그리고 빠진 만큼 체력이 줄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힘들어보인다는 이야기를 주로 들었다. 나의 상태가 고객들의 신뢰를 좌우하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계속 보이는 것보다는 괜찮음을 계속 어필했지만, 실제로도 점점 촬영장에 오래 서있기가 쉽지 않아졌다. 결국 계획했던 것보다 조금 더 일찍 촬영장에 가는 일을 줄였다.


음식이 내 삶의 행복에 70% 이상을 차지하는 나에게 무염식은 굉장한 고통이었다. 호르몬이 널뛰기를 해서인지 어느 날 밤엔 남편을 붙잡고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다면서 오열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할 수 있었던 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만 위험하다고 했으면, 하루, 이틀은 괜찮지 않을까 라며 꼼수를 찾아보기도 했을 것 같다. 이렇게까지 서러운 날에는 떡볶이 한 두점은 그냥 먹어도 될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했겠지만, 아이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하니 정말 엄두가 안났다. ‘닥치면 다 하게 된다’ 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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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도 봄은 왔다


엄마가 되는 일

임신도 익숙해졌다. 4개월 정도, 임산부 몸에도, 식단도 힘들긴 해도 안정기를 찾은 느낌이다. 예전만큼 어지럼증도 심하지 않아서 용기가 나는 날엔 조금 무리해서 외부 활동도 했다. 역시나 하루에 두 탕은 힘들었지만, 하루에 약속 하나 정도는 괜찮았다. 남편에게는 일을 줄이겠다, 줄이겠다 했지만 역시나 욕심이 났다. 몸이 조금 나아지니,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 더 받기도 하고, 사업화도 얼른 추진하고 싶어서 여러 가지로 일을 벌렸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병원에서 아기 초음파를 보는 날이었다. 초음파실 선생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한 부위를 반복적으로 보시더니, 아이 콩팥 한 쪽의 모양이 비정상적인 것 같다고 하셨다. 그 이후에도 뭐라고 뭐라고 하셨는데, “엄청 희귀한 케이스는 아니예요. 단일 신장으로 살아가는 분들도 많고 일상 생활에 크게 지장은 없을 거예요” 라는 말 외에는 아직도 기억이 나진 않는다.


약간은 벙찐 채로 진료에 들어갔는데, 담당 교수님도 처음으로 초음파를 다시 보자고 하시더니 같은 소견을 말씀하셨다. 비정상적인 콩팥은 아마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질 거라고, 단일 신장이 희귀한 케이스는 아니라면서 “많이 놀라셨을텐데 그래도 담담하시네요” 라고 하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차마 제가 신장이 안 좋은게 아이에게 영향을 끼쳤을까요?’ 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소리내어 묻지도 못했다. 그 말을 하면 정말 많이 울 것 같아서.

결국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복도에서 엉엉 울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겪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감사해야할 일이 더 많은데, 사실 이건 그렇게 큰 일도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나에게 벌어진 일이라, 그리고 하필이면 내가 신장이 안 좋을 때 이런 일이 생겨 다 나의 탓인 것만 같이 느껴져서 스스로를 향한 원망밖에 들지 않았다.


예전엔 이렇게 자책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니 왜 이렇게 자책을 하지? 누가 봐도 자기 탓이 아닌데’ 라고 생각하며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근데 겪어보니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분명 아이를 낳기로 한 결정을 한 것은 둘이지만, 이런 죄책감은 아이를 품고 있는 엄마들의 몫이었다. ‘혹시 그때 그게 문제였을까?’ 괜히 생각해 보게 되고, 엉엉 울면서도 ‘이렇게 울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했는데 안 좋은 감정이 전달된다고 했는데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당일은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이도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낮잠을 자고, 게임을 하고, 책을 읽고 다시 잠에 들었다.

이런 날도 참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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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자꾸 온다


의도하지 않은 쉼이 알려준 것

어떤 불안도 어떤 일도 그날만큼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보니, 그날은 처음으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허락한 날이었다. 나는 늘 내가 멈추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질 것 같았다.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으나, 내가 돈을 계속해서 벌기 위해 애를 썼던 것도 어떤 사회에서 나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한 애씀의 일부였다. 하지만 가족 계획을 세우면서 벌어진 모든 일들은 나를 강제로 멈춰세웠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었지만, 이를 통해 잠시 멈춰도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차근차근 걷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는 것 같다. 무언가 나를 계속 멈춰 세울 때,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더 조급하게 행동하기 보다는 조금은 답답해도, 오히려 천천히 단단히 정리하면서, 아이를 뱃속에서 잘 키워내면서, 앞으로 또 내가 멈춰질 순간들에도 너무 당황하지 않으면서 - 그렇게 이 시기를 보내야겠다.


물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넘어질 일은 많을 거다. 관성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몸이 먼저 쏠리는 나라서, 몸도 마음도 조금 잠잠해지고 나면 또 다시 그 이전의 안일한 행동을 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도 프리랜서라는 나의 업과 엄마라는 역할까지를 다 잘 해낼 수 있을지 100% 자신할 순 없다. 그럼에도 ‘닥치면 하게 된다’라는 그 말을 경험해봐서, 의지박약이라 생각했던 스스로가 아이를 위해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멈춰도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돼서, 앞으로가 그 전과는 다를 거라고, ‘엄마’인 나는 ‘프리랜서’로서도 더 강해질 거라고 자꾸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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