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X ESC 전시 <스페이스 익스페디션> 기획 비하인드 스토리 : 미지의 세계를 갈망하던 마음이 모여 만들어낸 우주
강남의 촘촘한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거친 바람이 불던 2022년 12월 9일 밤. 우주를 컨셉으로 삼은 복합문화공간 ESC의 전시 프로젝트 <스페이스 익스페디션> 런칭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파티에 가는 택시 안 차창 너머에는 한 해의 끝을 앞둔 이들의 화목한 얼굴이 보였다. 술잔을 기울이며 벌개진 얼굴을 웃음으로 채우는 사람들. “여기 세워드릴게요.” 택시 기사님의 짧고 단호한 말과 함께 엉겁결에 내가 내린 곳은, 다름 아닌 삼겹살 식당 앞이었다.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지도 앱을 켰다. ‘여기가 맞는데…’ 맞은편에 구멍 가게 치곤 제법 큰 동네 마트가 보였다. ‘길치’로 소문난 내가 주소를 잘못 찍었나 싶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돼지 기름 냄새와 매연이 뒤섞인 도시와는 상관 없다는 듯 푸른 아우라를 풍기는 곳이 눈에 띠었다. 복잡한 지구에 여유롭게 내려앉은 우주선같은. 내가 보는 게 환상일까, 현실일까? 도시에 착륙한 세계로 쭈뼛거리며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경한 즐거움을 만든 기획자 정혜윤을 만났다.
editor. 이슬기
아이는 별과 숲을 사랑했다
인터넷이 없던 9살 때부터, 저는 <과학동아> 잡지가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잡지에 실린 ‘세계 불가사의’나 외계인 관련 기사를 읽으며 취미를 즐겼거든요. 여전히 사이언스 픽션을 가장 좋아해요.
왜 이렇게 자연과 우주에 마음이 열리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거예요. 저와 제 동생은 학원을 다녀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제가 받은 모든 교육은 현장에서 이뤄졌죠. 저희 아빠가 밤하늘 별 보는 걸 정말 좋아하셨는데요. 아빠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늘 별자리를 짚어 알려주셨어요. 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을 찾는 일은 제게 너무 자연스러웠죠. 별자리 몇 개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조금 더 자라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모두 그렇진 않더라고요.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경험도 있어요. 제가 열 살 무렵부터 6~7년 정도는 매 주말마다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생태학교로 체험 학습을 다녔는데요. 그곳엔 저희 가족과 친한 가정이 있었어요. 그 집에는 저와 비슷한 또래의 남매가 있었는데, 나이대가 비슷하니 저흰 금방 가까워졌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아예 그 학교로 등교를 하기도 했죠. 강원도에 머물면서요. 그 당시에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 중에 서울과 지방의 초등학교 학생이 서로의 학교를 바꿔 다니는 교환 학생 프로그램이 있었거든요. 덕분에 제 강원도 친구와 전 한 달간 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거기서 매일 했던 일은 나비 잡아서 나비도감 보고, 철새 보고, 식물도감으로 공부하고, 밤에는 별을 보는 거였어요. 냇가에서 물고기도 잡고, 어른들이 그 물고기로 매운탕도 끓여 주시고요. 서울에서 태어나 컸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절반은 시골에서 자란 것이나 다름없어요. 이 성장 배경이 저에게 엄청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콘텐츠의 맥락을 이어 만든 공간
사이드에 우주 복합 문화 공간인 ESC 공간 마케팅 의뢰가 들어왔을 때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애초에 제가 얼마나 우주에 진심인지 알고 연락을 주신 거였거든요. ESC를 운영하는 콘텐츠 회사 SMON의 디렉터 분이 언젠가 저와 꼭 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셨대요. 그렇게 시리즈 전시 프로젝트 <SPACE EXPEDITION: 스페이스 익스페디션>이 탄생했어요. 여러 행성을 탐험하는 컨셉으로 분기별로 새로운 에피소드가 나올 예정이에요. 각 에피소드와 어울리는 F&B 메뉴도 개발하고 NFT도 만들고, 공연도 열고요.
▲ ESC 전시 <Space Expedition> EP1. VOYAGER 런칭 파티 포스터. / ©ESC
첫 번째 에피소드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키워드가 ‘칼 세이건의 보이저(Voyager) 호’예요. 우주 좋아하는 분들은 모두 사랑하는 키워드일 거예요. 칼 세이건이 가진 콘텐츠가 엄청 많거든요. 칼 세이건은 우주를 대중화시킨 사람이에요. 천문학자이지만 제게는 최고의 마케터예요. 보이저는 ‘항해’, ‘탐험’, ‘여행가’라는 뜻이 담겨 있어서 행성을 탐험하는 컨셉을 가진 전시의 첫 에피소드로 손색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칼 세이건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는데요. 지금은 제 일에 확신을 갖고 일하지만, 커리어가 막막한 순간도 있었어요. 기대하며 들어간 회사에 실망하고, 몸이 다 망가질 정도로 업무에 시달리다가 다음을 정하지 않고 퇴사를 결정한 때였죠. 퇴사 후 무작정 떠난 여행의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골라 본 BBC 다큐멘터리를 통해 칼 세이건을 처음 알게 된 거예요. 그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칼 세이건의 우주 탐사선 보이저호에 관한 이야기였거든요.
보이저호 발사는 이뤄지지 못할 뻔한 프로젝트였더라고요. 태양계의 행성을 탐사하려면 각 행성이 궤도 안에 위치해 있어야 해요. 태양계가 너무 크니까 행성들 간에 거리가 멀거든요. 그래서 한 번에 모든 행성을 관찰하긴 어려워요. 그런데 1977년에 한 대학생이 태양계의 모든 행성이 거의 일렬로 궤도에 들어서는 순간이 온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 학생은 곧장 나사 NASA에 연락해 이 사실을 알렸고, 서둘러 우주에 탐사선을 보내 행성들을 관찰해야 한다고 했어요. 이 기회를 놓치면 몇 백 년 후에나 일어날 일이라고요.
이 현상의 발견이 NASA에 알려지는 일 자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어요. 하지만 강한 의지를 가진 소수에 의해 실현됐죠. 궤도를 계산할 때는 슈퍼 컴퓨터를 돌려야 했는데, 그때만 해도 개인에게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던 시절이에요. 그 대학생이 다니던 학교의 투자가 없었다면, 애초에 발견이 이뤄지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칼 세이건이 없었다면 보이저호는 정말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지도 몰라요.
아시다시피, 태양계 행성 여러 개를 한 번에 관측할 수 있는 건 대단한 기회이지만, 일반인들은 관심이 없잖아요. 우주선 발사가 실패했다, 성공했다 정도를 볼 뿐이죠. 우주선을 쏘는 일 자체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일이기도 하고요. 이때 칼 세이건은 과학자들의 일을 지구인 프로젝트로 만들어버렸어요. ‘황금 레코드판’이 탄생한 배경이죠. 칼 세이건은 우주에 보여주고 싶은 지구의 모습을 담은 황금색 LP판을 보이저호에 붙였어요. 이 안에는 55개국어로 녹음한 아이들의 인사말과 지구의 음악이 담겼죠. 인간을 설명할 수 있는 사진들과 전세계 곳곳의 사진도 수록됐고요.
▲ 전시 공간에는 칼 세이건의 '황금 레코드판'이 놓였다.
그리고 레코드에 수록된 55개국어 아이들의 인사말을 들을 수 있도록 장비를 설치했다. / ©ESC
사람들은 보이저호를 우주에 띄우는 유리병으로 받아들였어요. 미지의 세계인 우주에 지구의 기록을 전달하자는 스토리텔링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죠. 이때부터 보이저호 프로젝트는 전 세계 뉴스에 보도되고, 어느 한 과학자의 일이 아니라 인류의 도전이 됐어요. 그렇게 지구인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으며 보이저호가 우주로 발사됩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글인 ‘창백한 푸른 점’도 보이저호에서 나온 콘텐츠예요. 보이저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 고개를 돌려서 지구를 찍는데요. 칼 세이건은 이 사진을 보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저는 이 이야기와 맥락을 정말 사랑해요. 저의 1호 타투로 보이저호와 창백한 푸른 점을 새겼을 정도로요.
진심이 모이면 입체를 이룬다
사이드의 강점은 기획과 아티스트를 연결하는 능력에 있어요. 오랫동안 제 안에 쌓여 온 데이터가 많아서 그런지, 기획을 할 때 자연스럽게 함께 할 분들과 레퍼런스가 떠오르는 편이에요. 이번 전시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명현 박사님, DJ DGURU, 권서영 작가님, 잡지 <과학동아>, 출판사 사이언스북스와 함께 할 수 있어 즐거웠어요. 이전부터 제가 좋아하는 마음으로 지켜봐온 사람들, 브랜드이기도 해요.
이명현 박사님은 스스로를 과학 커뮤니케이터라고 소개하시는데요. 대중에게 과학을 더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면서 과학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 여러 가지 콘텐츠를 만드는 분이에요. 과학 책방 ‘갈다’를 운영하시기도 하죠. 어떻게 보면 박사님은 칼 세이건과 닮은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DGURU 님은 제가 거의 10년 전부터 팬이었어요. DGURU 님이 소속된 이디오테잎을 정말 좋아했고, 매주 이디오테잎의 공연을 찾아가서 보던 시기도 있었거든요. 그냥 디제잉 하실 때도 자주 파티나 공연에 찾아갔고요. DGURU 님은 저보다 더 깊이 우주에 빠져 있어요. 과학적 지식도 방대한데, 이명현 박사님을 직접 연결해준 것도 DGURU 님이에요.
▲ <Space Expedition> EP1. VOYAGER 를 주제로 한 권서영 작가님의 아트 웍.
앞으로 기획될 에피소드에 따라 작업 스토리텔링이 이어질 예정이다./ ©ESC
전시 아트 웍을 작업해 주신 권서영 작가님과는 이미 예전에 함께 프로젝트 작업을 한 적이 있어요. 작가님은 우주를 모티브로 일러스트를 그리시잖아요. 제가 완전 작가님의 팬이었던 터라, 저의 전 직장인 ‘스페이스오디티’를 다닐 때부터 어떻게든 프로젝트에 함께 하려고 애썼어요. 그 결과 강연부터 일러스트 작업까지 다양한 작업들을 함께 했고, 그 당시 회사 내 다른 팀에도 작가님을 소개해드렸어요. 권서영 작가님과는 에피소드별로 아트웍을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하고 싶어요.
<과학동아>와도 귀여운 연결고리가 있는데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9살 때부터 <과학동아> 독자이기도 했고요. 작년에 <과학동아>에서 ‘창백한 푸른 점’ 핸드크림을 만든 적이 있어요. 독자들에게 지구의 향에 대한 설문을 받아서요. 그때 담당자 분이 우주 덕후인 저에게 제품을 선물하고 싶다며 먼저 연락을 주셨어요. 전 진심으로 반가웠어요. 어렸을 때부터 독자였다고 호들갑도 떨었죠. 그때 인연이 생겨서 ‘창백한 푸른 점' 핸드크림을 이번 기획에 포함시키고 싶다고 연락 드리니까 기꺼이 함께 해주셨어요. 저에게는 또 다른 성덕의 경험이에요.
사이언스북스는 칼 세이건의 책 협찬과 보이저호에 담긴 사진들을 제공해주셨는데요. 제가 칼 세이건을 워낙 좋아하니까 그가 쓴 책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사이언스북스 덕분에 방문객들과도 함께 읽어볼 수 있게 되었어요.
문화의 장벽은 낮추고 깊이는 더했다
초반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아무래도 비주얼이 중요한 시대 같아요. 요즘엔 워낙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통해 공간을 알게 되는 힘이 크잖아요. 이건 ESC가 원래 잘하던 일이에요. F&B나 영상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콘텐츠로 문턱을 낮추는 역할이요. ESC 공간 안에만 들어와도 느껴지는 차별점이 분명히 있거든요. 장인 정신으로 만든 고퀄리티의 영상들과 비주얼, 맛과 스토리를 전부 잡은 F&B라든지요. 일단 콘텐츠 자체가 재밌어요. 보기에도 예쁜데 맛도 좋아요.
그렇게 사람들이 낮아진 담을 넘어 이 공간에 들어오면, 우주가 담고 있는 여러 이야기를 오감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우주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도 쉽게 올 수 있는 공간이지만, 이곳에 들어오면 우주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었죠. ESC가 문을 열어주고, 사이드가 연결한 아티스트들과 콘텐츠를 통해 정보의 깊이를 입체감 있게 전달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역할 분배가 적절히 됐어요.
▲ ESC에서 직접 개발한 칼세이건 에디션 F&B 메뉴.
특히 초콜렛 무스 케이크에는 거대한 우주 속 '창백한 푸른 점'을 표현했다. / ©ESC
감사하게도 방문하신 분들이 이 포인트를 느끼신 것 같아요. 이명현 박사님도 이번 전시의 일환으로 강연을 진행하시며 관객들에게 ‘다들 점잖은 것 같으면서도 호기심이 많다’고 하셨어요. 모인 사람들 중엔 우주를 아예 모르는 분들도 꽤 있었는데요. 다들 집중력이 되게 높은 거예요.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도 되게 적극적으로 재밌는 질문들을 하시더라고요.
물론 우주 덕후들에게도 흥미로운 콘텐츠였어요. 전시 중에 과학 동아 기자님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자기가 취재하러 다닌 공간 중에 이렇게 힙한 곳은 없었다고요. 그 말이 재밌고 은근히 뿌듯했어요.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ESC의 김민영 디렉터도 레퍼런스가 없어서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문화, 예술, 과학, 음악, F&B, 심지어는 NFT까지. 다양한 영역의 콘텐츠가 우주를 중심에 둔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ESC라는 공간 안에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 ‘스페이스 익스페디션’ 프로젝트의 가장 흥미롭고 강력한 점이라고 봐요. 공간을 매개로 사람들에게 입체적인 경험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우주를 중심으로 팽창할 이야기
<스페이스 익스페디션>은 이후 에피소드가 쭉 쌓이면 더 근사한 프로젝트가 될 거예요. 가수의 앨범이 1, 2, 3집 계속 쌓이면 그 가수의 이야기가 더 깊어지잖아요. 앨범 커버들을 나란히 놓았을 때 보이는 맥락이 있고요.
첫 번째 에피소드는 클래식한 느낌이 나요. 우주 이야기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칼 세이건과 보이저호를 중심에 뒀고, 전시도 ESC가 주도하는 형태로 풀었으니까요. 그런데 앞으로 이어질 에피소드들은 또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될 예정이에요. 컨셉과 콘텐츠도 달라질 거고, NFT도 매번 새로 출시될 거예요. 이 에피소드가 시리즈로 쌓인 이후에 모아 놓고 보면 ‘아 이런 의도를 가진 기획이구나' 하고, 그제서야 비로소 메세지가 전달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ESC와의 협업을 통해 또 어떤 에피소드가 펼쳐질지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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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Collective Credit
- Client: Space Monster Contents
- Project Director: 융
- Collective Agents: 슬기, 보라, 꼽힌, 희
- Connected Artists: DJ DGURU, 이명현 천문학자, 권서영 작가
- Connected Brands: 과학동아, 사이언스북스
SIDE X ESC 전시 <스페이스 익스페디션> 기획 비하인드 스토리 : 미지의 세계를 갈망하던 마음이 모여 만들어낸 우주
강남의 촘촘한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거친 바람이 불던 2022년 12월 9일 밤. 우주를 컨셉으로 삼은 복합문화공간 ESC의 전시 프로젝트 <스페이스 익스페디션> 런칭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파티에 가는 택시 안 차창 너머에는 한 해의 끝을 앞둔 이들의 화목한 얼굴이 보였다. 술잔을 기울이며 벌개진 얼굴을 웃음으로 채우는 사람들. “여기 세워드릴게요.” 택시 기사님의 짧고 단호한 말과 함께 엉겁결에 내가 내린 곳은, 다름 아닌 삼겹살 식당 앞이었다.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지도 앱을 켰다. ‘여기가 맞는데…’ 맞은편에 구멍 가게 치곤 제법 큰 동네 마트가 보였다. ‘길치’로 소문난 내가 주소를 잘못 찍었나 싶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돼지 기름 냄새와 매연이 뒤섞인 도시와는 상관 없다는 듯 푸른 아우라를 풍기는 곳이 눈에 띠었다. 복잡한 지구에 여유롭게 내려앉은 우주선같은. 내가 보는 게 환상일까, 현실일까? 도시에 착륙한 세계로 쭈뼛거리며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경한 즐거움을 만든 기획자 정혜윤을 만났다.
editor. 이슬기
아이는 별과 숲을 사랑했다
인터넷이 없던 9살 때부터, 저는 <과학동아> 잡지가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잡지에 실린 ‘세계 불가사의’나 외계인 관련 기사를 읽으며 취미를 즐겼거든요. 여전히 사이언스 픽션을 가장 좋아해요.
왜 이렇게 자연과 우주에 마음이 열리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거예요. 저와 제 동생은 학원을 다녀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제가 받은 모든 교육은 현장에서 이뤄졌죠. 저희 아빠가 밤하늘 별 보는 걸 정말 좋아하셨는데요. 아빠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늘 별자리를 짚어 알려주셨어요. 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을 찾는 일은 제게 너무 자연스러웠죠. 별자리 몇 개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조금 더 자라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모두 그렇진 않더라고요.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경험도 있어요. 제가 열 살 무렵부터 6~7년 정도는 매 주말마다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생태학교로 체험 학습을 다녔는데요. 그곳엔 저희 가족과 친한 가정이 있었어요. 그 집에는 저와 비슷한 또래의 남매가 있었는데, 나이대가 비슷하니 저흰 금방 가까워졌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아예 그 학교로 등교를 하기도 했죠. 강원도에 머물면서요. 그 당시에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 중에 서울과 지방의 초등학교 학생이 서로의 학교를 바꿔 다니는 교환 학생 프로그램이 있었거든요. 덕분에 제 강원도 친구와 전 한 달간 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거기서 매일 했던 일은 나비 잡아서 나비도감 보고, 철새 보고, 식물도감으로 공부하고, 밤에는 별을 보는 거였어요. 냇가에서 물고기도 잡고, 어른들이 그 물고기로 매운탕도 끓여 주시고요. 서울에서 태어나 컸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절반은 시골에서 자란 것이나 다름없어요. 이 성장 배경이 저에게 엄청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콘텐츠의 맥락을 이어 만든 공간
사이드에 우주 복합 문화 공간인 ESC 공간 마케팅 의뢰가 들어왔을 때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애초에 제가 얼마나 우주에 진심인지 알고 연락을 주신 거였거든요. ESC를 운영하는 콘텐츠 회사 SMON의 디렉터 분이 언젠가 저와 꼭 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셨대요. 그렇게 시리즈 전시 프로젝트 <SPACE EXPEDITION: 스페이스 익스페디션>이 탄생했어요. 여러 행성을 탐험하는 컨셉으로 분기별로 새로운 에피소드가 나올 예정이에요. 각 에피소드와 어울리는 F&B 메뉴도 개발하고 NFT도 만들고, 공연도 열고요.
▲ ESC 전시 <Space Expedition> EP1. VOYAGER 런칭 파티 포스터. / ©ESC
첫 번째 에피소드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키워드가 ‘칼 세이건의 보이저(Voyager) 호’예요. 우주 좋아하는 분들은 모두 사랑하는 키워드일 거예요. 칼 세이건이 가진 콘텐츠가 엄청 많거든요. 칼 세이건은 우주를 대중화시킨 사람이에요. 천문학자이지만 제게는 최고의 마케터예요. 보이저는 ‘항해’, ‘탐험’, ‘여행가’라는 뜻이 담겨 있어서 행성을 탐험하는 컨셉을 가진 전시의 첫 에피소드로 손색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칼 세이건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는데요. 지금은 제 일에 확신을 갖고 일하지만, 커리어가 막막한 순간도 있었어요. 기대하며 들어간 회사에 실망하고, 몸이 다 망가질 정도로 업무에 시달리다가 다음을 정하지 않고 퇴사를 결정한 때였죠. 퇴사 후 무작정 떠난 여행의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골라 본 BBC 다큐멘터리를 통해 칼 세이건을 처음 알게 된 거예요. 그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칼 세이건의 우주 탐사선 보이저호에 관한 이야기였거든요.
보이저호 발사는 이뤄지지 못할 뻔한 프로젝트였더라고요. 태양계의 행성을 탐사하려면 각 행성이 궤도 안에 위치해 있어야 해요. 태양계가 너무 크니까 행성들 간에 거리가 멀거든요. 그래서 한 번에 모든 행성을 관찰하긴 어려워요. 그런데 1977년에 한 대학생이 태양계의 모든 행성이 거의 일렬로 궤도에 들어서는 순간이 온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 학생은 곧장 나사 NASA에 연락해 이 사실을 알렸고, 서둘러 우주에 탐사선을 보내 행성들을 관찰해야 한다고 했어요. 이 기회를 놓치면 몇 백 년 후에나 일어날 일이라고요.
이 현상의 발견이 NASA에 알려지는 일 자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어요. 하지만 강한 의지를 가진 소수에 의해 실현됐죠. 궤도를 계산할 때는 슈퍼 컴퓨터를 돌려야 했는데, 그때만 해도 개인에게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던 시절이에요. 그 대학생이 다니던 학교의 투자가 없었다면, 애초에 발견이 이뤄지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칼 세이건이 없었다면 보이저호는 정말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지도 몰라요.
아시다시피, 태양계 행성 여러 개를 한 번에 관측할 수 있는 건 대단한 기회이지만, 일반인들은 관심이 없잖아요. 우주선 발사가 실패했다, 성공했다 정도를 볼 뿐이죠. 우주선을 쏘는 일 자체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일이기도 하고요. 이때 칼 세이건은 과학자들의 일을 지구인 프로젝트로 만들어버렸어요. ‘황금 레코드판’이 탄생한 배경이죠. 칼 세이건은 우주에 보여주고 싶은 지구의 모습을 담은 황금색 LP판을 보이저호에 붙였어요. 이 안에는 55개국어로 녹음한 아이들의 인사말과 지구의 음악이 담겼죠. 인간을 설명할 수 있는 사진들과 전세계 곳곳의 사진도 수록됐고요.
▲ 전시 공간에는 칼 세이건의 '황금 레코드판'이 놓였다.
그리고 레코드에 수록된 55개국어 아이들의 인사말을 들을 수 있도록 장비를 설치했다. / ©ESC
사람들은 보이저호를 우주에 띄우는 유리병으로 받아들였어요. 미지의 세계인 우주에 지구의 기록을 전달하자는 스토리텔링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죠. 이때부터 보이저호 프로젝트는 전 세계 뉴스에 보도되고, 어느 한 과학자의 일이 아니라 인류의 도전이 됐어요. 그렇게 지구인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으며 보이저호가 우주로 발사됩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글인 ‘창백한 푸른 점’도 보이저호에서 나온 콘텐츠예요. 보이저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 고개를 돌려서 지구를 찍는데요. 칼 세이건은 이 사진을 보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저는 이 이야기와 맥락을 정말 사랑해요. 저의 1호 타투로 보이저호와 창백한 푸른 점을 새겼을 정도로요.
진심이 모이면 입체를 이룬다
사이드의 강점은 기획과 아티스트를 연결하는 능력에 있어요. 오랫동안 제 안에 쌓여 온 데이터가 많아서 그런지, 기획을 할 때 자연스럽게 함께 할 분들과 레퍼런스가 떠오르는 편이에요. 이번 전시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명현 박사님, DJ DGURU, 권서영 작가님, 잡지 <과학동아>, 출판사 사이언스북스와 함께 할 수 있어 즐거웠어요. 이전부터 제가 좋아하는 마음으로 지켜봐온 사람들, 브랜드이기도 해요.
이명현 박사님은 스스로를 과학 커뮤니케이터라고 소개하시는데요. 대중에게 과학을 더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면서 과학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 여러 가지 콘텐츠를 만드는 분이에요. 과학 책방 ‘갈다’를 운영하시기도 하죠. 어떻게 보면 박사님은 칼 세이건과 닮은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DGURU 님은 제가 거의 10년 전부터 팬이었어요. DGURU 님이 소속된 이디오테잎을 정말 좋아했고, 매주 이디오테잎의 공연을 찾아가서 보던 시기도 있었거든요. 그냥 디제잉 하실 때도 자주 파티나 공연에 찾아갔고요. DGURU 님은 저보다 더 깊이 우주에 빠져 있어요. 과학적 지식도 방대한데, 이명현 박사님을 직접 연결해준 것도 DGURU 님이에요.
▲ <Space Expedition> EP1. VOYAGER 를 주제로 한 권서영 작가님의 아트 웍.
앞으로 기획될 에피소드에 따라 작업 스토리텔링이 이어질 예정이다./ ©ESC
전시 아트 웍을 작업해 주신 권서영 작가님과는 이미 예전에 함께 프로젝트 작업을 한 적이 있어요. 작가님은 우주를 모티브로 일러스트를 그리시잖아요. 제가 완전 작가님의 팬이었던 터라, 저의 전 직장인 ‘스페이스오디티’를 다닐 때부터 어떻게든 프로젝트에 함께 하려고 애썼어요. 그 결과 강연부터 일러스트 작업까지 다양한 작업들을 함께 했고, 그 당시 회사 내 다른 팀에도 작가님을 소개해드렸어요. 권서영 작가님과는 에피소드별로 아트웍을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하고 싶어요.
<과학동아>와도 귀여운 연결고리가 있는데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9살 때부터 <과학동아> 독자이기도 했고요. 작년에 <과학동아>에서 ‘창백한 푸른 점’ 핸드크림을 만든 적이 있어요. 독자들에게 지구의 향에 대한 설문을 받아서요. 그때 담당자 분이 우주 덕후인 저에게 제품을 선물하고 싶다며 먼저 연락을 주셨어요. 전 진심으로 반가웠어요. 어렸을 때부터 독자였다고 호들갑도 떨었죠. 그때 인연이 생겨서 ‘창백한 푸른 점' 핸드크림을 이번 기획에 포함시키고 싶다고 연락 드리니까 기꺼이 함께 해주셨어요. 저에게는 또 다른 성덕의 경험이에요.
사이언스북스는 칼 세이건의 책 협찬과 보이저호에 담긴 사진들을 제공해주셨는데요. 제가 칼 세이건을 워낙 좋아하니까 그가 쓴 책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사이언스북스 덕분에 방문객들과도 함께 읽어볼 수 있게 되었어요.
문화의 장벽은 낮추고 깊이는 더했다
초반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아무래도 비주얼이 중요한 시대 같아요. 요즘엔 워낙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통해 공간을 알게 되는 힘이 크잖아요. 이건 ESC가 원래 잘하던 일이에요. F&B나 영상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콘텐츠로 문턱을 낮추는 역할이요. ESC 공간 안에만 들어와도 느껴지는 차별점이 분명히 있거든요. 장인 정신으로 만든 고퀄리티의 영상들과 비주얼, 맛과 스토리를 전부 잡은 F&B라든지요. 일단 콘텐츠 자체가 재밌어요. 보기에도 예쁜데 맛도 좋아요.
그렇게 사람들이 낮아진 담을 넘어 이 공간에 들어오면, 우주가 담고 있는 여러 이야기를 오감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우주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도 쉽게 올 수 있는 공간이지만, 이곳에 들어오면 우주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었죠. ESC가 문을 열어주고, 사이드가 연결한 아티스트들과 콘텐츠를 통해 정보의 깊이를 입체감 있게 전달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역할 분배가 적절히 됐어요.
▲ ESC에서 직접 개발한 칼세이건 에디션 F&B 메뉴.
특히 초콜렛 무스 케이크에는 거대한 우주 속 '창백한 푸른 점'을 표현했다. / ©ESC
감사하게도 방문하신 분들이 이 포인트를 느끼신 것 같아요. 이명현 박사님도 이번 전시의 일환으로 강연을 진행하시며 관객들에게 ‘다들 점잖은 것 같으면서도 호기심이 많다’고 하셨어요. 모인 사람들 중엔 우주를 아예 모르는 분들도 꽤 있었는데요. 다들 집중력이 되게 높은 거예요.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도 되게 적극적으로 재밌는 질문들을 하시더라고요.
물론 우주 덕후들에게도 흥미로운 콘텐츠였어요. 전시 중에 과학 동아 기자님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자기가 취재하러 다닌 공간 중에 이렇게 힙한 곳은 없었다고요. 그 말이 재밌고 은근히 뿌듯했어요.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ESC의 김민영 디렉터도 레퍼런스가 없어서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문화, 예술, 과학, 음악, F&B, 심지어는 NFT까지. 다양한 영역의 콘텐츠가 우주를 중심에 둔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ESC라는 공간 안에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 ‘스페이스 익스페디션’ 프로젝트의 가장 흥미롭고 강력한 점이라고 봐요. 공간을 매개로 사람들에게 입체적인 경험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우주를 중심으로 팽창할 이야기
<스페이스 익스페디션>은 이후 에피소드가 쭉 쌓이면 더 근사한 프로젝트가 될 거예요. 가수의 앨범이 1, 2, 3집 계속 쌓이면 그 가수의 이야기가 더 깊어지잖아요. 앨범 커버들을 나란히 놓았을 때 보이는 맥락이 있고요.
첫 번째 에피소드는 클래식한 느낌이 나요. 우주 이야기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칼 세이건과 보이저호를 중심에 뒀고, 전시도 ESC가 주도하는 형태로 풀었으니까요. 그런데 앞으로 이어질 에피소드들은 또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될 예정이에요. 컨셉과 콘텐츠도 달라질 거고, NFT도 매번 새로 출시될 거예요. 이 에피소드가 시리즈로 쌓인 이후에 모아 놓고 보면 ‘아 이런 의도를 가진 기획이구나' 하고, 그제서야 비로소 메세지가 전달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ESC와의 협업을 통해 또 어떤 에피소드가 펼쳐질지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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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Collective Credit
- Client: Space Monster Contents
- Project Director: 융
- Collective Agents: 슬기, 보라, 꼽힌, 희
- Connected Artists: DJ DGURU, 이명현 천문학자, 권서영 작가
- Connected Brands: 과학동아, 사이언스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