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INTERVIEW
예술가로 일하는
이 시대의 노동자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내는, MBC 라디오 PD 장수연
희: 장수연 PD는 자신을 ‘주어진 일을 하는 직장인’이라고 소개했다. 명료하다 못해 의아한 자기소개 뒤엔 분명 숨은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정확했다. 그가 해맑게 소개한 내용 뒤엔 동경의 시간을 지나, 자기만의 그릇을 갖추기까지의 긴 과정이 놓여 있었다. 오랜 인내와 고민을 반복하며 그는, 다만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일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장수연 PD는 지상파, 종편, 케이블, 유튜브, 넷플릭스를 아울러 열개의 프로그램의 무대 뒤를 조명한다. 널리 사랑 받았던 콘텐츠를 만든 작가, 감독, PD들을 인터뷰해 팟캐스트를 진행하였고, 이 중 열 편의 이야기가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 이라는 책 한 권에 담겨 나왔다. 인터뷰를 촬영하는 동안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인터뷰에 담긴 이야기는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겠노라고.
👀장수연 PD 인터뷰 영상으로 보기
융: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수연: 안녕하세요, 저는 MBC 방송사에서 라디오 PD로 일하고 있습니다. 라디오 PD는 한 프로그램을 여러 PD들이 이어달리기하듯이 함께 진행하는데요. 제가 그동안 맡은 프로그램은 김신영 씨가 진행한 <정오의 희망곡>, 양요섭 씨의 <꿈꾸는 라디오>, 그리고 이석훈 씨와 <브런치 카페>를 론칭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기를 낳게 되면서는 네 권의 책을 썼어요. 최근엔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융: 이 책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지금 담당하고 계신 라디오 프로그램은 무엇이죠?
수연: 지금은 라디오 편성 기획팀에 있는데요. 라디오국 안에서 주민 센터 같은 역할을 하는 부서예요. 여러 민원을 처리하는 부서죠.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동시에 김겨울 씨가 진행하시는 <라디오 북클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융: 제가 라디오 키즈였거든요(웃음). 그래서 이 대화가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요.
수연: 어쩐지 선한 기운이 느껴지시더라 (웃음)!
융: PD님은 직접 팟캐스트도 기획하셨잖아요. 팟캐스트는 어떻게 시작했는지 궁금해요.
수연: 라디오 PD의 업무는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이건 내 프로젝트다’라고 말하기가 되게 애매하죠.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하는 순간에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그렇게 10년 넘게 일을 해오다 보니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맺을 수 있는, ‘나만 잘하면 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예를 들어 글 쓰는 건 나만 잘하면 되는 작업이었어요. 그래서 글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도 늘 있었어요. 그리고 10년 넘게 프로그램 연출을 해오면서 ‘이 작품은 내가 성공시켰지’라고 할만한, 말하자면 대표작에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욕구가 있었어요. ‘잘하는 사람들은 뭐가 다르지? 저 사람은 어떻게 성공한 거지? 나도 잘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 성공작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듣고 싶다.’
이런 일련의 맥락에서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됐어요. 사람들이 직접 찾고 이걸 콕 집어서 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그런 콘텐츠를 만들어보는 경험이 저의 업무에도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도 들었어요. 그렇게 성공한 PD들을 인터뷰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그걸 책으로 완결하는 형태로 이었어요.
융: 팟캐스트가 책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로는 어떻게 연결됐나요?
수연: 저는 사실 제 팟캐스트가 대박 날 줄 알았어요. 팟캐스트 하면 딱 생각나는 대표적인 채널들이 있잖아요.
<듣다 보면 똑똑해지는 라디오: 듣똑라>라든지, <조용한 생활>이라든지. 저는 그렇게 대표적인 채널을 만들고 싶었어요. 제가 만드는 건 유명한 PD 님들이 나오니까, 잘 될 줄 알았어요. 근데 생각보다 잘 안되는 거예요.
융: 그런데 어떻게 계속할 수 있었어요?
수연: 제 특기가 계속하는 거예요. 잘 안돼도 그냥 일정한 기간 이상은 끌고 가요. 오래 하는 건 사실 그리 어렵지 않거든요. 하지만 달콤한 성공을 맛보기를 원했으나(웃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 것인가 생각했을 때, 책을 떠올렸어요. 어떤 이야기를 완결된 형태의 한 작품으로 세상에 내놓고, 관심 있는 사람들이 언제든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책이라는 매체잖아요. 책으로 마무리 지으면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결정적으로 우리 희희 편집자 님께서 좋은 제안을 해주셨죠.
융: 인터뷰하신 분들이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은 프로그램 연출진들이잖아요. 지상파뿐만 아니라 종편 채널과 케이블 채널, 넷플릭스까지 다양한 채널이 다뤄져서 저는 더 재밌었어요. 이분들을 직접 섭외하신 건가요?
수연: 원래 알던 분들도 있고, 대뜸 전화한 분도 있었어요.
융 : 시작이 되게 어렵고 두려울 수도 있을 텐데요. PD 님은 시작에 두려움을 느끼는 편인가요?
수연: 책에서 보면 수신지 작가님과 김보통 작가님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시작은 너무 쉽다. 맺는 것이 훨씬 어려운 작업이고 중요한 작업이다’. 그 말을 빌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시작은 어렵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대신 계속하는 걸 쉽게 생각하면 좋겠어요.
시작을 두렵게 만들고 부담스럽게 하는 요인이 분명 있을 거예요.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일일 경우엔 성공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요인들이 있을 거고요. 여러 사람과 운명을 함께 짊어지고 시작해야 하는 일일 경우에도 어려운 부분이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조금 더 냉철하게 판단해서, 나를 두렵게 하는 요인들을 가능한 한으로 제거하고 시작하는 게 맞다고 봐요. 일단 그렇게 시작한 일은 계속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일이든 관성이 붙으면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아요. 처음 세팅하는 게 제일 어렵죠. 잘 안되는 것 같아도 그냥 하는 거예요. 매일매일 하다 보면, 쌓인 시간의 힘이 분명 있어요. 저는 팟캐스트를 운영하면서 40명이 넘는 분들을 인터뷰했어요. 그렇게 많은 분을 만나기 위해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죠. 거기서 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딱 10명만 인터뷰했으면 깊이가 떨어졌을 거예요.
융: 저는 시작을 빨리하고 계속하는 걸 조금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난 왜 이렇게 하나에 집중해 오래 하는 걸 잘 못하지’라고 생각했거든요.
수연: 제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15년간 만들면서 알게 된 건데, 잘하는 것보다 오래 하는 게 더 쉬워요. 잘하는 건 되게 어려워요. 진짜 잘하는 것보다 오래 하는 게 쉬운데, 오래 하면 보통 잘하게 돼요. 여러분 오래 하세요~
융: 저는 이 책에 나온 10개 프로그램과 각 프로그램을 연출한 분들과의 대화 자체가 영감이었어요. 특히 PD님이 적어주신 코멘터리들이 너무 좋았어요. 위로를 받은 구절이 있었는데, 읽어볼게요.
내가 무슨 예술가도 아니고’라고 자조하면서도 예술을 하던 많은 직업인을 떠올린다.
그것은 창작자가 가진 노동자로서의 면모였다.
노동자이기만 한 노동자가 아니라 예술가이고 싶은 노동자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지금 하는 일에 몰입하고 싶은 마음,
완성도 있게 일을 해내고 싶은 마음, 상품보다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내 안에 예술가를 깨웠다가 잠재웠다가 적절하게 다독여가며 일하느라 괴로운 건 내가 아직 창작자 예술가로서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저도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을 하고 있고 되게 다양한 작업자분들을 팀으로 꾸려서 일을 하고 있는데요. 이 글을 읽으면서 중간자이자 매개자로서 내 역할은 이런 거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을 하다 보면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운 클라이언트도 있고, 생각이 다른 분도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럴 때 어떻게 헤쳐 나가시나요?
수연: 읽어주신 구절은 저와 함께 일한 파트너 분들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쓴 거예요. 라디오 공개 방송을 기획할 때, 예산이 한정돼 있음에도 잘 만들고 싶은 욕심쟁이 같은 마음이 생기잖아요. 사실 스태프들께 ‘업계 최고의 대우’, 이런 건 못 해드려요. 라디오는 특히 그래요. 제작비가 많지 않아요. 그런데 다들 배정된 예산으로는 만들 수 없는 퀄리티를 가져오시는 거예요. 그때 그런 감동이 있어요. 특히 홍유빈 감독님이 그러셨는데, 감독님께는 그냥 작업 자체가 너무 중요한 거예요. 이걸 완성도 있고 멋지게 만드는 것 자체가 이 사람한테는 핵심이구나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런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었어요.
저는 어쨌든 직장인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하라고 하는 일을 해요. 주어진 일을 하죠. 이걸 더 잘한다고 해서 돈이 더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런데 돈 더 들어오는 거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하자, 하면 내가 더 행복할까? 또 그렇지는 않잖아요.
우리는 왜 모두 이렇게까지 일하는 걸까? 그 무대 감독님은 왜 그렇게 일하시며, 나는 왜 이러는 걸까라는 질문에 대한 제 나름의 답이었어요. 왜냐하면 그건 우리가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것은 나의 자존하고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이구나.
받은 돈보다 훨씬 더 멋진 퀄리티의 작업물을 가져오신 분에게 제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분의 작업물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고, 그렇게 했을 때 제 기분이 좋았어요.
“감독님 너무 멋있습니다. 이 작업물 덕분에 이 공개 방송이 정말 훌륭했어요!” 진심으로 표현했을 때 그분께도 만족감을 줄 거라고 생각해요.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연출하신 김희원 감독님이 그런 말을 반복해서 하세요.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시청률이었다.”
근데 그 말은 김희원 감독님이 직접 할 수 있는 말이지, 회사나 방송사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로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마음가짐인 거죠. 클라이언트가 창작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작업물은 되게 이상한 데로 갈 수 있어요. 매체에서 클라이언트는 시청자나 청취자가 될 텐데요. 그들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길 원하지만 정말 그분들이 뜻하는 대로만 작품이 흘러가면 만족스러워하지 않으세요. 드라마를 예로 들면, 시청자들이 원하는 그림 그대로 드라마가 전개되면, 그 드라마가 재미있을까요? 그분들의 더 깊은 내면엔 그런 욕망이 있는 거예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걸 가져와줘!
창작자는 그걸 맞춰야 해요. 당신이 말하지 않은 당신의 니즈(needs)가 무엇인지 스무고개 하듯이 짚어주는 거죠. ‘이건가? 저건가요?’ 그 길을 찾아가는 힘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창작성, 예술가로서의 면모라고 생각해요. 클라이언트가 말하는 액면 그대로를 구현하기만 하면, 그 길은 찾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융: 저는 지금 같이 일하는 좋은 클라이언트 분들이 너무 많아요. 전 마법이 일어난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요. 클라이언트가 창작자에게 제일 좋은 에너지가 나오게끔 판과 권한을 줬을 때, 클라이언트 쪽에서도 바랐던 그림이 나오더라고요. 저도 그걸 목격하는 순간이 제일 기뻐요.
전체적으로 책을 정리하면서 관통하는 메시지나 가장 영감받은 부분들은 어떤 게 있으신가요?
수연: 제가 아까 잘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잘하게 됐는지 궁금해서 시작한 게 팟캐스트였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팟캐스트를 하면서 저도 몰랐던 저의 마음을 발견했는데요. 잘하는 사람들은 뭔가 다른 종족일 거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대단한 사람들에겐 대단한 면모가 있을 거라고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그냥 제 마음이 편한 거였어요. 나에겐 그런 대단한 면모가 없으니까 성공을 못 이룬 거라고 생각해버렸거든요.
성취를 이룬 사람은 별난 게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고, 나라는 사실을 이분들을 만나면서 알게 됐어요. 그분들이라고 해서 엄청난 재능이나 특별한 운을 갖춘 게 아니었거든요. 그저 나와 똑같은 고민을 헤쳐나가고 비슷한 장애물을 만나면서 성공을 이룬 거예요. 그러니까 저에게 변명할 여지가 없는 거죠.
진짜 엄청난 재능을 갖춘 사람들도 있겠죠. 근데 저는 마크 저커버그나 일론 머스크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제가 만난 인터뷰이들의 성공이 딱 제가 이루고 싶은 지점이었죠. 이렇게 대중과 소통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딱 이 정도요. 그런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분들이 저와 비슷한 고민을 했고, 열심을 다했다는 부분이, 저만의 어떤 변명거리를 제거한 것 같아서 그게 굉장한 인사이트였어요.
융: 줄곧 말씀해 주셨는데, 계속하는 건 쉽다고 하셨잖아요. PD님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이에요?
수연: 저는 오늘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아요. 이게 쌓이면 언젠가 생각지 못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오늘이 아니더라도 그냥 하는 거예요. 보통 우리가 오늘 하루에 엄청 큰 기대를 걸지는 않잖아요. 그럼에도 그냥 그 순간순간 살아가죠. 일도 그렇게 하면 길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오래 하려면 비효율성을 좀 참을 수 있어야 해요. ‘이거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은데’ 싶은 순간도 넘길 줄 알아야 오래 할 수 있어요. 효율적인 것만 해서 가성비를 따지게 되면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게 되게 어려워지잖아요. 일단 하기로 마음먹었고, 하는 게 맞다는 결론이 났다면, 그다음부터는 비효율적인 일과 순간도 넘어가면 돼요. 하다 보면 늘 비효율적이지만은 않아요.
융: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을 계속 해오고 있는데, 언제 영감을 받으시나요?
수연: 과거에는 있었어요. 책 <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을 썼을 때만 해도 첫 방송의 흔적들을 모았어요. 특히 제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첫 순간을 모으는 걸요! 누군가의 첫 순간을 보면 되게 위로가 되거든요. ‘이 사람도 떨었어!’ 하고요. 그가 지금의 모습을 만들기까지 지나쳐 왔을 시간을 생각하면 ‘그래, 쉽게 되는 일은 없지’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애가 셋이지 않습니까? 사치입니다. 저는 절대적인 시간 빈곤자예요.
영감은 어느 순간 갑자기 딱 발견되는 게 아니라는 부분에 많은 분이 공감하실 것 같아요. 일상의 많은 요소를 어떻게 꿰느냐의 문제인데, 저는 늘 책을 읽고 글 쓰는 시간을 가져요. 글로 정리하면서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영감으로 만드는 것 같아요.
융: 라디오 PD의 꿈은 언제부터 가진 거예요?
수연: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전 되게 낭만적인 케이스예요. 어릴 적부터 꿈꾸던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근데 그런 경우가 많지 않잖아요. 꼭 라디오 PD가 아니더라도 라디오 방송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내내 가졌어요.
융: 라디오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있나요?
수연: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좋았고, 무엇보다 라디오 안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지금은 방송을 거의 안 하시지만, 가수 김동률 씨도 예전에 라디오 진행을 하셨거든요. 그리고 저한테 의미가 큰 유희열 씨가 당시 라디오 속에서 낄낄대면서 농담을 하는 것도 좋고 실없는 얘기를 하는 것도 좋았어요. 이 사람들과 가까운 동료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융: 누군가의 첫 데뷔 무대를 다 찾아본다고 하셨는데, PD님의 처음은 어땠나요?
수연: 제가 처음 연출한 프로그램은 운명 같았어요. 제가 지금도 하고 있는 < 라디오 북 클럽>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그때 당시에는 영화감독 장진 감독님이 진행을 하셨고, 제가 연출을 했었죠.
융: 그때 꿈을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나요?
수연: 그때는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해내기 바빠서 그랬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제가 처음 섭외한 DJ가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예요. 사실 그 순간이 더 강렬히 남아있어요. 그때만 해도 이동진 씨가 따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없었어요. 한창 라디오 게스트로 자주 출연하시다가 잠깐 쉬는 시기였는데요. 마침 제가 당시에 <문화야 놀자>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교체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었어요. 진짜 신입사원의 패기였죠(웃음). 다행히 그 당시 부장님이 “해 봐!”라고 승인해 주셨죠.
그래서 바로 이동진 씨에게 섭외 전화를 드렸어요. 그런데 이동진 씨가 게스트 섭외 전화라고 생각하셨는지 되게 방어적이신 거예요. 거절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신 기색이 느껴져서 제가 황급히 말씀드렸어요. 저는 이동진 씨를 진행자로 생각하고 있다고요. 이동진 씨 특유의 화법을 아시는 분들은 저희의 대화 장면이 상상되실 텐데요. 그분은 되게 간결하게 말씀하는 분이시거든요. 황급한 제 말을 듣더니 바로 그러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는 저에게 조금 흥미롭게 들리네요.” 나중에 이동진 씨와 가까워지고 프로그램 같이 하면서 그 말이 굉장한 호감의 표시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당시에는 그게 호감의 표현인 줄 모르고 그저 희망을 붙잡고 이동진 씨 작업실로 직접 찾아갔어요. 그때 어찌나 떨리던지…. 저는 대학생 때 이동진 씨의 조선일보 칼럼 ‘시네마 레터’를 필사하면서 읽던 사람이에요. 그런 분을 섭외해야 한다니 얼마나 떨렸겠어요. ‘나는 PD야. 쫄면 안 돼!’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죠. 높은 하이힐을 신고, 호피 무늬 니트 같은 걸 입고 잔뜩 힘을 주고 갔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겉모습은 화려하게 하고 갔는데 바들바들 떠는 거예요. 그런데 이동진 씨가 굉장히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 본인 책을 주시면서 편히 앉으시라고 말씀해 주셨죠. 그때 당시에는 ‘나 제법 PD 같았어’ 하며 스스로 만족했는데요. 나이 들면서 생각하니까 그때 이동진 씨가 저를 배려해서 이것저것 많이 물어봐 주셨다는 걸 느꼈어요.
융: 최근에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수연: 최근에 <라디오 북클럽> 프로그램 속 코너들을 살짝 개편했는데, ‘작가 초대석’이라는 코너를 신설했어요. 사실 <라디오 북클럽>이 <정오의 희망곡>이나 <굿모닝 FM>처럼 많은 사람이 듣는 프로그램은 아니에요. 시간대도 출근 시간이나 점심시간이 아니라 일요일 오전 6시 5분, 표준 FM95.9에서 진행되는데요. 그렇다 보니 제가 무언가 변화를 주었다고 해서, 청취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기대하긴 쉽지 않아요.
다만 장류진 작가, 봉태규 작가, 박연준 시인과 같은 분들을 섭외해서 저희 진행자 김겨울 작가님께 대화의 판을 깔아드리면 엄청 좋아하세요. 청취율에서 오는 성취감을 얻긴 어렵지만 저희 진행자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성취감을 느꼈어요. 실은 이게 번거로운 작업이에요. 매번 새로운 누군가를 섭외를 해야 하니까요. 굳이 복잡한 포맷을 도입했지만, 그 덕분에 이 프로를 만드는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는 것 자체가 저에겐 큰 성취감을 안겨요.
융: 언젠가 만들고 싶은 꿈의 프로그램이 있나요?
수연: 옛날에는 공개 방송의 확장판인 페스티벌 같은 것도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요. 지금은 다가오는 9월 1일에 연출을 맡은 토크 콘서트가 열리거든요? 일단 그걸 좀 잘하고 싶어요. 더 멀리 봤을 땐, 제가 라디오 PD 생활을 하면서 큰 위로가 되고, 의미를 주었던 프로그램들을 직접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제 학창 시절을 위로한 프로그램들을 연출한 PD 선배들을 입사하고서 만났을 때, ‘바로 이 분이구나!’ 했었는데요. 정작 그분들은 그 프로그램을 만들 때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고 인지하진 못하셨다고 하더라고요.
한번은 유희열 씨와 <음악 도시> 프로그램을 만들고 <올댓 뮤직>을 만들었던 PD 선배들이 까치집 머리로 배를 긁으며 복도를 지나가셨어요. 제게 뜬금없이 “너도 음악도시 들었냐?”고 물어보셔서, “네! 저 너무 좋게 들었어요!”라고 대답했는데, 되게 퉁명스럽게 옆의 다른 선배에게 “봤지? 얘도 들었대.” 그러고 마는 거예요(웃음).
저는 그 프로그램에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그분들은 그냥 직장 생활을 하신 거였죠. 다만 그 직장 생활을 예술가로서의 어떤 면모로 하셨던 거예요. 그게 저와 같은 일반 청취자들에게 강렬히 느껴졌던 거고요. 저도 지금 이 시대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며, 누군가에게 그런 느낌을 주고 싶다는 정도의 꿈을 꿔요.
융 : 저는 개인적으로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된 음악이 너무 많아요. PD님은 라디오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수연: 요즘은 새로운 노래를 듣기 위해 라디오를 듣는 분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워낙 다양한 음악 플랫폼과 알고리즘이 좋은 음악을 많이 추천해 주니까요. 그런데 라디오는 내가 알던 노래를 다르게 듣게 해주는 매력이 있어요.
아나운서 정지영 씨와 <오늘 아침>을 운영하시는 유천 PD 님께 들었는데요. 어느 날 이런 사연이 왔대요. ‘필라테스를 시작을 했어요. 필라테스를 오래 하면서 건강해지고 싶은데, 그런 저에게 음악 하나 추천해 주세요.’ 유천 선배님이 남을 웃기는 걸 좋아하는 분이라서, 엄청 고민했대요. 그러다가 나훈아의 <테스형!>을 틀었대요. 필라테스라서 테스형(웃음). 그걸 되게 뿌듯해 하시더라고요. <테스형!>을 원래 알았지만, 이제 필라테스 하면 그 노래가 생각날 거예요.
라디오는 어떤 이야기와 음악이 함께 전달되기 때문에 알던 노래를 다르게 듣게 만들어요. 낯선 곳으로의 탐험이라기보단 알던 것을 새롭게 보는 차원의 탐험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수연: 제가 지금 일하는 부서가 라디오 편성 기획부라고, 일종의 주민센터라고 했잖아요. 얼마 전에 후배 PD들로부터 선배들이 선곡 세미나 같은 걸 열어주시면 좋겠다는 민원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 민원을 해결하려고 선곡을 굉장히 잘하고 음악 프로그램을 오래 연출한 선배를 모셨거든요. 그 선배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오랫동안 사랑받은 노래가 있고, 오래전에 사랑받은 노래가 있다.”
예를 들어 S.E.S나 핑클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S.E.S의 <달리기> 같은 경우는 오랫동안 사랑받은 노래예요. 당대에도 사랑받았지만 줄곧 사람들이 즐겨 들었죠. 그런 노래들이 갖는 힘이 있대요. 익숙하기 때문에 그냥 듣기만 해도 따라 부를 수 있죠.
오래전에 사랑받았던 노래는 아티스트 활동 당시에는 인기가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잊힌 노래들인데요. 근데 그런 노래가 갖는 힘은 또 다르다는 거예요. 그런 노래가 흘러나오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요. 오직 그때 사랑받았던 노래만 할 수 있는 작업인 거예요. 라디오가 그걸 해줘요. 라디오는 어느 순간을 다르게 만들어주는 매체가 아닌가 싶어요.
융: 책의 말미에 딸들한테 남긴 말이 있더라고요. 육아야말로 엄청난 탐험의 세계인 것 같은데요. 육아를 하면서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수연: 육아를 하면서 제 첫 책을 썼어요. 아빠도 그렇겠지만, 특히 우리 사회의 엄마들은 아이를 낳은 후 자아를 잃어버릴 것에 대한 공포감과 위기감을 굉장히 많이 느껴요. 그래서 나를 잃지 않고자 하는 의지가 간절해지는데요. 저 역시 이때 ‘내가 어떤 사람이지?’, ‘나는 뭘 좋아하지?’,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게 뭐지?’ 하는 고민을 치열하게 했어요.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나 자신을 설명할 작업들을 하고 싶어졌죠.
근데 제가 첫 책을 낸 시기는 저의 온 하루가 아이에게 잡아먹히는 나날이었어요. 같은 일을 해도 익숙하지 않으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잖아요. 그땐 육아가 서툴렀죠. 그래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글을 썼는데요. 다행히 이 몸부림이 책으로 엮이면서 제 글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생겼고, 두 번째 책과 세 번째 책, 그리고 네 번째 책까지 내게 됐네요.
육아를 하면서 시간에 민감해졌어요. 시간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근데 아이를 키우면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돼요. ‘아기가 이만큼 컸구나’ 하고 시간이 흐르는 게 보여요.
Credit.
Interviewer | 융 (@alohayoon)
Interviewee | 장수연(@jangsypd)
정리: 희 (@daily_hee__)
교정,교열: 슬기 (@s_eul.g)